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누가복음 13:22-30, 521장.
민수기 36장 – 신명기 6장
TV 무슨 프로였는지는 모르겠는데 아주 흥미로운 프로를 봤습니다.
새벽 3시 50분에 버스 첫차가 상계동에서 출발하여 강남역까지 가는 버스가 있는데 이른 시간에도 버스가 만차예요. 다 강남역 근처 빌딩으로 청소하러 가시는 분들인데 다들 일이 있는 것에 대해서 감사해 하는 인터뷰를 보면서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분들 말이 이렇게 새벽에라도 일이 있어서 벌어서 자녀들에게 손 벌리지 않고 살아서 너무 너무 좋다고.
일할 수 있는 것에 대한 감사.
우리가 사는 데 있어서 경제적인 문제란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먹어야 살고 입어야 사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합니다.
이번 지도자는 경제를 살리는 대통령이 되었으면.
‘차선은 최선의 원수다’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최선이신 하나님과 교제한다고 하면서 차선, 3선, 4선을 찾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독일의 유명한 신학자 본 회퍼의 유명한 신학명제가 있습니다.
“값싼 은혜가 우리 교회의 치명적인 원수다.”
흔히들 복을 달라고 비는데 그 속에 예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복된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핍박당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자가 복이 있나니.
복된 길을 다 가르쳐주셨거늘 다 마다한 채 손바닥 내놓고 무작정 복주십사, 몸부림칩니다. 이것은 잘못된 신앙입니다.
또한 십자가 없는 예수,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께서는 전부 십자가에 초점을 맞추십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여기에 생명의 길이 있다, 하십니다.
그런데 흔히들 십자가는 간데없이 안일하게 부활하신 예수만을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discipline, 규율이 없는 은혜, 훈련과정을 무시한 은혜를 생각합니다. 신앙생활에도 긴 시간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을 주실 때 훌쩍 책장을 넘기듯이 하루아침에 주신 것이 아닙니다. 사십 년이라고 하는 긴 discipline 코스,
이 과정을 통해서 가나안 땅을 주셨습니다.
사실 공부에도 지름길은 없습니다. 공부에 요행수는 없는 것입니다.
빨리 빨리 되지 않는 것입니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깨닫고 또 깨닫고.
여러분, 인격이란 전기 스위치를 건드리면 반짝하고 불이 들어오듯이, 컴퓨터를 클릭하면 금새 눈앞에 화면이 뜨듯이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훌륭한 인격은 많은 시간과 훈련이 필요합니다.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훌륭한 인격으로 키워져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거늘 요사이는 모두가 그저 급하기만 합니다. 무엇이든 automatic으로, 자동으로 데꺽데꺽 이루어지기만을 바랍니다. 이 조급함에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귀한 진리를 망각하고 있습니다.
기나긴 훈련과정, 이 시련, 이것이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을 통하여 복주시고 선한 길로 인도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 아주 의미심장한 질문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23절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잘 생각해 봅시다.
제자들이 처음에 예수님을 따를 때 기적을 바라고, 축복을 바라고, 출세를 바라고 따랐습니다. 그런데 따르면서 예수님의 교훈을 잘 들어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 마음에 깨달음이 옵니다.
예수님 말씀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약대가 바늘 귀 들어가기보다 어렵다,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 하십니다.
이런 말씀 하시는 것을 보고, ‘아 내 소원성취, 아무래도 어렵겠는데...’
그래서 그런 질문을 해 본 것입니다.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이에 예수님께서 이만큼이다, 저만큼이다, 10%다, 20%다 하시지 않고 딱 한 마디 말씀을 하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많은 교인들이 어떻게 해야 잘 삽니까?
자기 할 탓이지요.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서입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이 여기 있는데 이것은 하지 않고 그냥 쉽게 가려고,
아니면 누가 해 주기를 바라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나이 40이 넘어서도 나이 많은, 늙은 부모에게 의지해서
얼마나 창피한 일인 줄 모르고
부모의 도움 없이는 살아가지를 못합니다.
결혼 주례, 부모 곁을 떠나, 경제적 독립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하십니다. 얼마나 좁은지 봅시다.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하십니다.
많은 사람이 결심을 합니다. 그러나 중도에 하차합니다. 모처럼 하나님의 사람으로 출발하여 예수의 제자가 되겠다고 나섰다가도
못하는 사람이 많으리라,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일이 마술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의지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말씀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좁은 문은 예루살렘성에 큰 성문이 있고 이는 아침에 열렸다가 저녁에 닫히는 문입니다. 그러면 밤중에 멀리서 돌아오는 사람들이 성 안에 들어와야 되는데 들어오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을 위해서 따로 비상구를 만들었습니다.
성문 곁에 개구멍같은 조그만 문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것을 ‘바늘 귀문’이라 하였습니다. 이것이 좁은문입니다.
말을 타고 들어올 수 없습니다. 짐을 가지고 들어올 수 없습니다.
교만한 자도 안됩니다. 오직 겸손한 사람, 마음을 비운 사람만이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그리로 들어가려면 버릴 것이 많습니다. 교만, 자존심, 욕심도, 명예도 다 버리고 오직 순순하게 생명위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것이 좁은 문입니다.
천국 문이 닫힌 다음에 가서 두드리고 25절 “열어주소서”하지마는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하십니다.
‘아, 모르다니요? 26절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아주 재미있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주 앞에서 먹고 마셨구요. 주님과 함께 음식 나누었고 또 주님이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는데요’
27절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너와 함께 나가 음식을 나누었다고 해서 그게 어쨌단 말이며 너희 길거리에서 가르치는 것을 네가 들었다고 하나 들었으니 어떻단 말이며 보았으니 어떻단 말이냐. So What?
음식 같이 먹었다고 그게 구원의 조건이냐? 보고 먹고 배워도 그것으로는 안된다고 하십니다. total commitment가 있어야 합니다.
내 십자가를 내가 지어야 합니다. 내 십자가를 다른 사람, 부모에게 맡깁니다. 어른의 의미는 내 인생 내가 책임져야 합니다.
좁은 문은 시간적으로 좁습니다. 일단 닫히면 다시 열 수가 없습니다.
우리 앞에 잠깐잠깐씩 문이 열립니다. 열렸을 때 들어가야 됩니다.
일단 닫히고 나면 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 할 수 있을 때 하여야 됩니다. 일할 수 있을 때 일해야 됩니다.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일할 수 없습니다.
특별히 회개하는 것, 회개할 기회를 하나님께서 주실 때 회개하여야 됩니다. 회개할 기회를 놓치면 가슴을 쳐도 회개할 수가 없습니다.
항상 열려 있는 문이 아닙니다. 종말론적인 기회가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는데, 이 소중한 기회를 놓치면 안됩니다.
운동기구가 있다고 건강해 집니까? 아니올시다. 운동을 하여야 합니다.
제가 운동을 열심히 할 때 아무 운동 기구도 없었지만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기구가 필요 없습니다. 내가 하겠다는 의지, 헌신이 중요한 것입니다.
운동은 나 스스로가 하여야 내가 건강해지는 것입니다.
결국은 내가 봉사하고 내가 헌신해서 그 속에서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듣기만 하고 보기만 하고 그대로 앉아 있는 것은 아무 소용없는 일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구원의 절대 조건이 무엇입니까?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십니다. 아주 단순한 마음입니다.
아주 단순한 마음, simple mind 거기에 구원이 길이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어린 아이와 같게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 나를 좇는 자도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 하십니다.
내 몫의 십자가를 조용히 지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소위 성공했다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존경받는 분들, 하나같이 한평생 외길을 간 사람들입니다.
휘청휘청하고 넓게 산 사람들이 아닙니다. 좁게 산 사람들입니다. 먹을 수 있다고 다 먹고, 잘 수 있다고 다 자고, 그러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넓은 길이 있지마는 내가 가야 할 길은 좁은 길입니다.
넓은 세상이지마는 내가 생각해야 될 것은 좁은 길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넓은 세상을 좁게 살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좁혀 가면서 살아야 됩니다.
“우리가 먼 훗날에 역사의 심판대 앞에 서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질문을 받게 될 것이라고 미국의 J.F. KENNEDY 대통령은 말합니다.
너는 용감하였는가, 너는 성실하였는가, 너는 헌신하였는가?”
우리가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과연 무슨 대답을 할 수 있겠습니까?
넓게 산 사람은 유구무언일 것입니다.
좁은 문 뒤에 영생이 있고, 넓은 문 뒤에 사망이 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스스로 좁혀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자신의 노력으로 오히려 좁혀가며, 좁혀가며 살아라.
힘들어 보이지만은 즐거운 마음으로 기뻐하며 열려진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교회 상황을 설명드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목회자들의 은퇴는 보통 65-70세 사이에 이루어지는 것이 보편적인
추세입니다. 여러분들이 궁금해 하실 여러분들의 담임 목사의 은퇴는
제가 만 70세가 되는 내년 2026년 5월입니다.
죄송하게 생각하는 것은 2022년 이 자리로 이사오면서 새하늘 교회라는
공동체를 사랑하시는 분들만 남게 되었는데 이 공동체를 유지시키지 못하게 되어서 송구한 마음입니다.
그래도 목회자의 입장에서는 항상 임대료가 몇 달씩 연체되는 일이 없어져서 임대료 부담없이 목회를 하게 되고 5층에서 예배드리고 4층에서 식사하고 각방에서 셀모임할 수 있게 되어서
교회 재정에 대해서 말씀드리면 여러분들이 내신 헌금으로 우리들의 점심 식사까지 자율적으로 다 해결하게 되었습니다.
안식년 없이 담임 목사의 휴가는 일 년에 두 번하기로 결정한 바 있어서
6/9-20, 10/20-31 가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궁금해 하실 상황에 대하여 보고 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