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알의 밀, 요한복음 12:19-26, 510장.
출애굽기 40장, 레위기 1-6장
오늘은 우리 교회로 보면 우리 교회가 시작한지 21년이 되는 기념 주일입니다. 2004. 3월 28일. 상암동에서 전도사 시절 첫 예배, 개척
2008, 2011, 2016, 2022년 지금의 자리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돌아보면 볼수록 발자국마다 하나님의 은총이었음을 깊이 깨닫게 되고,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저희 집 사람이 요즘 목사님 입이 거칠어 지셨다고 해요.
갈라진 이 나라를 보면서, 전광훈이라는 정치 깡패 목사가 나와서 하는 행태를 보면서 마음이 답답하고 힘이 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답답하고 괴로운 세상을 다 보시면서도, 우리 생각에는 당장 화끈하게 문제를 처리하셔야 할 것 같은데 그러지 않으십니다.
한 민족을 선택하시고, 한 가정을 선택하시고, 한 사람을 선택하셔서 서서히, 마치 겨자씨를 보는 것같이, 조용히 조용히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이것이 창세기 12장에 나타난 선택의 도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백성을 구원하시고자 무슨 천지개벽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을 감화하고, 중생케 하고 가르치고, 그리고 그 역사가 파급되어서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 history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고향과 친척을 떠나라 명령하시면서 그에게 약속을 주십니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여러분, 이것을 깊이 생각하셔야 합니다. 네가 복되게 살리라, 하신 것이
아니고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하십니다.
물론 나 자신도 행복해져야겠지만 오히려 나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이 행복해 지는 것, 그것이야말로 큰 축복인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복의 근원이 될지라’ 하십니다.
요셉의 신분도 분명히 애굽으로 팔려간 하나의 노예였습니다.
보디발이라고 하는 애굽의 시위대장 집에 팔려간 노예입니다마는 그 요셉이 그곳에서 하나님 앞에 신앙적으로 바로 서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때에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위하여 그 집에 복을 주십니다. 창세기 39:5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바로 이런 사람들이 복의 근원이 된 사람들입니다.
망하는 세상이지만 이런 사람들이 있으면 망하지 않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때도 하나님께서는 의인 열 명을 찾으십니다.
더 나아가 예레미야 5:1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옹서하리라”
한 사람만 있어도 이 성을 옹서하리라,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왜? 이 한 사람을 통해서 파급효과가 이루어지기를 기다리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체에 대하여 진노를 참으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보면 그는 한 평생 발붙일 만큼도 땅도 얻지 못하고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한평생 천막 치고 유목민으로 이리 방황하고 저리 방황하고 이리 쫓기고 저리 쫓기며 살았습니다. 창세기 23장을 보면 사라를 묻을 곳이 없어 헤트족속에게 막벨라 굴을 사서 장사지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으로 인해서 모든 민족이, 모든 나라가, 모든 열방이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약속의 땅, 그냥 갖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통과한 영광.
고난을 통과하지 않은 영광 없습니다.
우리가 영적인 문제와 영원에 대하여 심각하게 생각하는 때가 언제입니까?
고달팠을 때가 아닙니까? 괴로울 때 우리는 비로소 인간에 대하여, 인생에 대하여, 영생에 대하여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인생의 험한 골짜기를 울면서 지나가지만 그 한 방울 한 방울의
눈물들이 기쁨의 샘물이 될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33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초대교회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을 보면 오늘날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성공의 요소라고 하는 것들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들은 갈릴리의 가난한 어부 출신들로서, 애초에 넉넉한 재산도 없었지만
그나마 가지고 있던 것도 다 버려 두고 주님을 따랐던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그들에게는 자신의 몸 밖에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지식이 남들보다 뛰어났습니까, 사회적으로 높은 명예를 가지고 있었습니까?
그런데 그들이 역사를 뒤엎었습니다. 그 위대한 로마 제국을 변화시켰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겠습니까?
한 마디로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영에 의하여 점화된 사람들이었습니다.
변변치 않았던 사람들 120여명이 마가의 다락방에서 옹기종기 모여 엎드려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성경(행 2:4)에 보면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지난 날을 탓할 것도 없고, 환경을 불평할 것도 없습니다.
문제는 나 하나가 오늘 이 시간에 어떤 사람으로 나타나느냐가 중요합니다.
나로 인해서 주변에 어떤 일들이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나는 복의 근원입니까? 화의 근원입니까?
나 하나의 문제입니다. 내가 복의 근원이 되는 삶을 살아갈 때 내가 속한
가정이 살고 내가 속한 교회가 살고 내가 속한 직장이 사는 것입니다.
인도의 성자로 불리는 마하트마 간디는 사람을 파괴하는 세 가지의 큰 죄악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 세 가지 죄악은 ‘일하지 않고 얻는 재산’
‘원칙이 없는 정치’ 마지막으로 ‘희생이 없는 종교’라고 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재산, 정치, 종교는 꼭 필요하고 유익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필요하고 유익하다 하더라도 원칙이 제대로 서 있지 않으면 그것은 도리어 인간을 파멸시키는 악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먼저 일하지 않고 얻는 재산.
하나님을 믿으면서 혹시 하나님이 대박을 터뜨려서 사업이 하루아침에 잘 되기를 바라지는 않으십니까?
열심히 일하고 땀을 흘려서 버는 것만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듭니다.
우리의 관심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부를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이 되면 저절로 인생의 문제가 해결되고 잘 살게.
아브라함 링컨. “하나님이 내 편이 되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 편에 서게 해 달라고 기도 해야겠지요”
원칙이 없는 정치, 사회
원칙이 잘 지켜지는 나라가 잘 사는 나라.
원칙이 잘 지켜지지 않는 나라가 못 사는 나라.
그런 면에서 우리나라도 선진국으로 가려면 질서가 지켜져야.
마지막으로 희생이 없는 종교.
세계사를 공부해 보면 전쟁 중에 가장 무섭고, 잔인한 전쟁이 종교 전쟁이었습니다. 십자군 전쟁. 전쟁의 명분으로 하나님의 뜻을 내세웠지만 그 내면에는 인간의 욕심과 욕망이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구교와 신교도 같은 기독교지만 많이들 죽였습니다. 프랑스의 개신교를 위그노라고 하는데 위그노를 통하여 스위스의 시계 산업이 발달을 하고, 영국의 산업혁명이 성공을 합니다. 전형적인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께서 이루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섬김을 통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힘으로 지배하며 다스리는 곳이 아니라 사랑과 헌신으로 서로를 섬기는 곳입니다.
그리고 섬김에는 헌신과 희생이 따릅니다.
그 본을 보이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희생의 종교, 사랑의 종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의 배경은 종려주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능력으로 로마 군대를 물리치고 로마의 식민지로부터 해방시켜 주기를 갈망했습니다.
예수님을 얼마나 열광적으로 맞이했던지 19절을 보면 예수님을 적대시하던 바리새인들이 이제는 예수를 어쩔 수 없다고 포기를 할 정도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 성에 올라온 몇 명의 헬라인들이었습니다.
그리스인. 이방인. 그들은 헬라인이면서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빌립과 안드레를 찾아가 예수님을 만나게 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빌립과 안드레는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만나기를 원한다고 전했습니다.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만나기를 원한다는 말을 들은 예수님은 그들을 만나겠다 아니면 안 만나겠다는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는 동문서답. 한 알의 밀에 대한 교훈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삶을 땅에 떨어져 썩음으로 많은 열매를 맺는 한 알의 밀에 비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예루살렘 성에 오신 것은 십자가의 죽음을 이루기 위함인데 그 십자가의 길은 한 알의 밀이 썩는 것처럼 자신의 헌신과 희생이 따라야 하고 그 길을 가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신앙은 강요에 의해 이뤄지지 않습니다.
신앙은 사람을 감동시키는 매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 매력 가운데 으뜸이 섬김입니다.
낮아져서 섬기는 모습은 사람의 마음을 감동하게 만듭니다.
그것이 영광의 자리를 뒤로 하고 한 알의 밀이 되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의 언덕을 오르신 예수님의 삶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이유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진정한 정신이고, 힘입니다.
인생은 사실은 죽음을 향한 길입니다. 잘 죽는 연습이 될 때 그 인생이 진정으로 복됩니다. 죽어야 사는 것이 기독교의 핵심 진리입니다.
기독교는 죽음으로 기억됩니다.
어떻게 죽느냐가 그 인생의 가장 화려한 절정입니다.
세상의 모든 이치도 죽어야 다시 삽니다.
남편이 아내를 자기 입맛대로 길들이려고 하면 갈등과 싸움이 일어납니다. 아내가 남편을 자기 맘대로 조정하려고 하면 분쟁이 생깁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도 서로 죽어야 삽니다. 부모는 자신의 생각과 뜻을 죽이고 자녀의 입장에서 이해하면 서로 소통이 됩니다. 행복한 관계를 이룹니다.
직장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먼저 남을 위해 섬기고, 자신이 죽으면 결국은 인정받고, 높임을 받습니다. 그러나 항상 자기중심적인 사람, 남을
이용해서 자기를 높이고자 하는 사람은 인정을 받을 수 없습니다.
모든 인간관계도 똑같습니다. 내가 먼저 죽어야.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우리의 영성은 ‘자아를 얼마나 죽였는가?’입니다.
내가 얼마나 죽었는가를 보면 내 신앙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은혜를 받고, 은사를 받았다 할지라도 아직도 내 안에 혈기가 죽지 않고, 내 고집과 내 주장이 살아있다면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영적 민감함으로 늘 날을 세우고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바보들은 항상 결심만 한다’고 합니다.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한 알의 밀 법칙을 알고 있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누구나 알지만 아무나 실천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고통과 죽음이 없는 넓은 길로 자꾸만 가려 합니다.
그러나 그 길은 진정한 생명의 길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예외 없이 고난의 골고다 언덕을 통해서 우리한테 부활의 새 생명을 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 모두도 예수님처럼 ‘한 알의 밀’의 법칙을 나에게 주어진 환경 속에서 실천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