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되게 하신 것, 에베소서 4:1-3, 412장
신명기 21-27장
지금으로부터 약 53년 전, 1972년에 미국을 처음 갔을 때 이야기입니다.
미국사람들이 저를 만나면 신기해 하며 어디서 왔느냐고 묻습니다.
Korea에서 왔다고 하면 꼭 묻는 질문이 South와 North 어디에서 왔냐고 물j으면 제가 어디가 더 좋으냐고 질문을 합니다. 그러면 그들이 난감해 하면서 하는 대답이 둘 다 좋다 그럽니다. 그 대답에 제가 너무 놀랐습니다.
당연히 저는 South Korea가 좋다고 할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어떤 할머니가 South Korea가 좋다고 하시면서 제 손을 잡고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 너희 나라에 참전해서 전사했다고 하시면서 눈물을 흘리며 반가워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번 주 목요일은 6,25전쟁 75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많은 세월이 흘렸지만 6,25전쟁은 여전히 우리 민족에게는 아픔의 역사로 남아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나라는 전 세계적으로 유일한 분단국으로 전쟁이 끝나지 않은 휴전 상태의 나라입니다.
이 땅에 완전한 전쟁의 위협이 사라지고 평화가 올 때까지 우리는 6,25전쟁을 기억하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1950년 6월 25일, 그날은 바로 주일이었습니다. 주일에 전쟁이 터졌습니다. 군인들과 공무원들이 쉬고 있는 그날, 휴가가고 없는 그날 전쟁이 터졌습니다. 이렇게 일어난 전쟁으로 사상자가 무려 520만 명, 이산가족이 1000만, 유엔군만도 15만 명이 이 땅에서 죽었습니다.
6 25동란, 그것은 승자도 패자도 없는 전쟁이었습니다. 이러한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면 그 누구도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을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모든 전쟁은 인간의 욕심과 오판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전쟁은 변명의 여지없는 죄악입니다. 전쟁은 우리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합니다. 전쟁은 절대로 문제의 해결이 아닙니다.
오직 평화적으로 협력하여 통일을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 마음 속에 통일에 대한 염원은 있어야 하는데.
통일 반대가 많이 늘은 것에 대한 우려.
독일에 바이츠체커라고 하는 대통령이
“과거에 대해서 눈을 감는 자는 현재에도 눈이 멀게 됩니다.”
여러분, 과거에 매이면 미래가 없지만 그러나 과거를 잊으면 같은 일을 반복하게 됩니다. 여러분, 과거를 잊어서는 안됩니다.
가난했던 때 잊어서는 안됩니다. 내가 병들었던 때 잊어서는 안됩니다.
내가 실패하고 낙심하고 미래가 캄캄하게 보이던 그때를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과거에 경험한 것, 뼈아프게 경험한 것, 엄청난 값을 지불하고 깨달은 것, 이거 잊어서는 안됩니다.
사실은 사람에게 있어서 경험한 것만 내 지식으로 남는 것입니다.
치매가 왜 무섭습니까? 경험이 아무 소용없는 사람입니다.
잠언 26:11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
여러분, 6 25전쟁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이 6 25전쟁을 통해서 ‘이념’이라고 하는 것, ‘이데올로기’라고 하는 것이 이렇게 무서운 줄을 배웠습니다.
이념이 사람을 이렇게 바꾸는 줄 몰랐습니다. 우리는 그저 민족이요, 사랑이요, 화평이요 하면 다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김 구 선생님도 ‘아, 민족이면 그만이지 이념은 무슨 이념이냐’하고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가서 김일성을 만났는데, 만나보고는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이념이 그렇게 무서운 것인줄 몰랐다고 합니다.
우리 조상들이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공산주의자들과도 손을 잡고 독립운동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해방이 딱 되고 보니 정신이 버쩍 드는 것입니다.
민족 위에 이념이 있었습니다. 이념이 이렇게 만듭니다. 얼마나 무서운지 이 이념에 한 번 탁 걸려들면 사람이 그렇게 달라질 수가 없습니다.
어제의 친구가 오늘은 전혀 딴사람으로 나타납니다. 이념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우리는 6 25전쟁을 통해서 비로소 경험하였습니다.
여러분, 6 25전쟁이 우리에게는 ‘전쟁’입니다만 북한에서는 절대로 ‘전쟁’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국토통일을 위한 ‘해방전’ 민족통일을 위한 ‘해방전’이라고 합니다. 저들은 지금도 남한 사람들이 ‘미제국주의’라고 하는 외세 때문에 미국의 노예가 되어서 고생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저들을 미국의 압제에서 해방시키자, 몇 몇 자본을 독점하고 있는 자들, 저 지배 계급으로로부터 해방시키자, 그래서 ‘해방전’입니다.
특별히 오늘 우리가 가슴 아파할 일은 하나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되지 아니하면 나도 불행하고 저도 불행합니다. 우리 모두가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까? 하나되어야 할 줄을 알면서, 그렇게 외치면서 그렇게 노력하면서 왜 안되느냐, 이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됨의 의미를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되려고 노력할 것 없습니다. 본래가 하나입니다.
근본으로 돌아갈 때, 비로소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미국이 남북전쟁을 하고 있을 때 포토맥 강을 사이에 두고 북군과 남군이 대치하였습니다. 이제 날이 밝으면 전쟁이 개시되서 많은 사람이 죽게 될 것입니다. 그날 밤입니다. 달빛이 흐르고 사위가 조용합니다.
병사들이 불안에 떨면서 하룻밤을 지냅니다. 어느 병사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합니다. “Home, Sweet Home” 우리 나라의 고향의 봄과 같은 노래.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리
내 나라 내 기쁨 길이 쉴 곳도
꽃피고 새우는 집 내 집 뿐이요
오 사랑 나의 집
즐거운 내 벗 내 집 뿐이리
옆에서도 따라들 부릅니다. 강 건너편으로 소리가 전해졌습니다.
그 쪽에서도 이 노래를 맞추어 부르기 시작합니다. 일대가 노래로 가득찼습니다. 모두들 저마다 목이 메인 채 계속 부릅니다.
다음 날, 전쟁은 없었습니다. 다들 근본으로 돌아갔기 때문입니다. 제정신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왜 싸워야 되는 것입니까? 내 쉴 곳인 내 고향집이 저기에 있는데 나는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야 하나? 이렇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동질성 회복이라고 합니다.
버나드 쇼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이웃에 대한 가장 악한 죄는
이웃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나를 구별하는 것이다.’
구별하는 것이 죄가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때로는 이것이 살인보다 더 무서운 죄입니다. 인권에 대한 살인입니다.
우리는 다 같은 죄인이요, 다 하나님 앞에 부족하고, 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다 그렇게 태어나서 그렇게 죽어가는 것입니다.
무덤에 가 보세요. 아무리 비석이 크든 작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는 무덤에 장식하는 것처럼 맹랑한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비석이 큰 게 무슨 대단한 것 같습니까? 쓸데없는 짓입니다.
생각해 봅시다. 묘비가 크건 작건 무덤이 크건 작건 그 속에는 똑같이 썩은 시체 아니면 화장한 뼈만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한 가지입니다.
돈이 있으면 어떻고 없으면 어떻습니까? 우리 모두 동일합니다.
여러분, 로마 제국이 얼마나 엄청난 나라였습니까? 그런데 기독교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렇게도 핍박하던 기독교를 313년에 밀라노 칙령으로 인정하게 되고 392년에 데오도시우스 황제는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기까지 공로자가 둘 있습니다.
그 하나가 노예요, 다른 하나가 여성입니다. 로마인구의 3분의 1이 노예였습니다. 로마사람의 눈에 노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팔고 사고 죽이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존재였습니다. 하나의 물건이요 동물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노예의 숫자가 너무 많아지자 통제 불가능이 됩니다. 곳곳에서 노예 폭동이 일어나 주인에게 반항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를 믿는 노예들이 있었습니다. 이 크리스찬 노예들이 주인을 위해서 기도하는 모습에 주인들이 감동을 받습니다. 이 기도하는 노예들의 힘이 대로마제국을 뒤집어 놓은 것입니다.
또 하나는 여성입니다. 그 옛날 여성의 위치란 죄송하게도 형편이 없었습니다. 인구조사를 할 때도 여자는 셈에 넣지 않았습니다. 남자의 부속품으로 취급하여 남자만 머리수로 쳤습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에서는 다 같은 하나님의 형상이기에 똑같은 형제자매로 보았습니다. 당시의 여성들은 예수를 믿으면서 비로소 인간적인 대우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 사정은 우리나라도 동일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어느 교회를 가나 여성분들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천대받던 불쌍한 사람들을 하나같이 대하시고 정신병자까지도 아브라함의 딸이라 부르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 같은 더러운 여자도 사랑하시고, 부활하시어 제일 먼저 그를 만나주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하나됨의 세계관입니다. 그런고로 그리스도인 되었다는 것은 곧 하나되었다 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이 하나되게 합니다. 벌써 하나되게 하였습니다.
하나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됨을 깨닫고 하나됨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상대방을 향하여 긍휼, 연민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종교의 기본은 거룩인데 유대인의 거룩은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이 분명하게 구별되고 분리되는 것을 통하여 유지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연민 때문에 이 분리와 구별을 넘으셨다는 것입니다.
사실 연민의 헬라어 원어의 의미는 내장이 끊어질 듯한 아픔을 느끼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말로 하자면 애간장이 녹는다는 말입니다.
이 말을 잘 표현한 영어 단어가 compassion입니다. com은 ‘함께’라는 뜻이고, passion은 ‘아픔’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compassion은 함께 아픔을 느끼되, 정말 내 애간장이 녹는듯하게, 내 내장이 끊어질 듯한 그런 아픔을 함께 느끼는 것을 말합니다.
돌아온 탕자,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도 연민을 이야기합니다.
연민은 아파하는 것들과 함께 아파하는 가슴을 뜻합니다.
아파하는 생명을 보면서 저건 죄인이야하고 정죄하거나 인생을 제대로 못살았으니까 저 모양 저 꼴이지 말하면서 나와 다른 존재로 금을 그어버리고 난 바운더리 이쪽에서 즉 내 공간, 내 삶의 자리에서 아파하는 이들과 무관하게 살면서 예수를 따른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성경을 많이 보고,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해서 은혜를 받았다 해도, 연민이 없으면 단순한 종교인에 그치고 마는 것입니다. 그 메마른 가슴으로는 그 팍팍한 가슴으로는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파하는 생명과 함께 아파할 때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시고, 힘을 주시고, 기적을 주시고, 치료해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라고.
내가 나됨을 알게 될 때, 하나됨을 아는 순간, 온유하고 겸손해 집니다.
그리고 ‘오래 참음으로’라고 하였습니다. 혹 나와 의견이 다른 것이 있더라도 멀리 내다보고 오래참음으로 사랑의 줄로 매게 될 때 비로소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오늘 성경은 하나됨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몸이 하나요, 성령이 하나요, 소망이 하나요, 부르심이 하나요,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다른 것이라면 오직 은사뿐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 동시에 저 북한에 있는 동포들도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형상이고 저희도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하나 됨입니다.
이미 이루신 하나됨을 굳게 지켜나가심으로 세상이 주지 못하는 기쁨과
자유함과 평강을 진정으로 만끽하게 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