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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과 말씀(사도행전 10:44-48)

  

 

    성령과 말씀, 사도행전 10:44-48, 185장

 

출애굽기 12-18장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은 구조적으로 세 요소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즉, 육과 혼과 영으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첫째가 biological being, 즉 생리적 존재입니다. 

우리 모두는 육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육신의 일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요한삼서 2절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둘째는 philosophical being, 철학적 존재입니다.

우리에게 이성이 주어졌고 그 이성에 따라 비판도 하고 추리도 합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코지토 에르고 숨(Cōgitō ergo sum)’

생각해야 합니다. 

세 번째가 theological being, 신학적 존재입니다. 

하나님과 만나야 하고 하나님과 교제를 가져야만 하는 영적 존재입니다.

 

이 세 개가 합쳐져서 하나의 인격으로 종합된 구조를 가지고 인간은 살아갑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느 쪽이 주도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육체가 주도하는 삶을 삽니다. 자나 깨나 육체적 욕망에 끌려 삽니다. 육욕주도적인 인간이라 하겠습니다. 

그런가하면 철저하게 이성주도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먹고 입어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합리적인 일로써 행복해 합니다. 

그러나 영적 주도적인 사람은 항상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될 때에 행복해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사랑을 느끼며,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참된 평화를 느끼고 힘을 얻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존재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영은 하나님께로서부터 오는 말씀을 먹고 삽니다. 

마태복음 4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광야로 나가 시험을 받으실 때에 마귀와의 시험에서 4절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사람이 살아가는데에 떡, 즉 육적인 양식이 필요하지만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사는 영적인 존재라고 하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먹어야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먹지 못하고 지나게 되면 영양실조에 걸리게 됩니다.

영양실조에 걸리게 되면 여러 가지 병을 얻게 되어 있습니다. 

캄보디아에 선교를 가서 영양실조로 눈이 잘 안 보여 장님처럼 더듬는 아이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에게 눈 비타민을 먹였더니 이 아이가 눈을 뜹니다. 비타민이 정말로 중요한 것이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먹기는 먹어도 제대로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제대로 먹는다는 문제는 육적인 문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허하고, 영적으로 허한 사람 모두에게 해당하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이 배가 고프면 무엇이건 먹게 됩니다. 허하게 되면 평소에 쳐다보지도 않던 음식도 만나게 보이는 것입니다.  

베트남전 때 미군포로들.

마찬가지로 영적으로도 허한 사람이 되면 그릇된 사상에 빠지고, 이단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단에 왜 빠집니까? 영적으로 갈급한 사람들에게 바르지 못한 영이 전달될 때 이단에 빠지는 것입니다. 

허해서 그렇습니다. 이단은 끝에 가서 달라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처음에는 그럴 듯 해 보이고 비슷해 보이지만 끝에 가서 달라지는 것입니다.

디도서 3:10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배고프면 먹어야 하지만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적당히 먹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배고파서 죽겠다고 하고, 먹고 나서는 배 불러 죽겠다고 합니다. 

지나치거나 모자라게 먹지 말 것이며 내 몸에 꼭 필요한 만큼 섭취해야 합니다. 남이 좋다고 해서 나에게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내게 필요한 것을 적당하게 먹는 것입니다.

또 음식은 맛있게 먹어야 합니다. 같은 음식이라도 맛있게 먹고 감사함으로 먹는 데에 건강의 비결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맛있게들 먹고 계십니까?

사탄은 모습을 진화하지만 우리들의 무기는 오직 성경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영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4:15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제가 목회를 하면서 가슴으로 담은 말씀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의 영적 아버지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말씀 안에서 출생하는 것입니다. 반드시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아무리 옥토라 하더라도 씨가 뿌려지지 않고 자라는 법은 없습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말씀이 아니고는 결코 새 생명의 역사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말씀 안에서 우리가 거듭 납니다. 그 다음에는 말씀을 먹고 성장합니다. 끊임없이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 안에서 양육됩니다.

 

학자들은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말씀을 두고 ‘제2의 오순절’이라는 별명을 붙여 부릅니다. 첫 번째 오순절은 사도행전 2장에 마가다락방에서 일어난 성령 강림사건이 있은 그 오순절입니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유대사람들에게 나타났던 일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타난 것은 가이사랴에서 있었던 사건입니다.

전적으로 이방인에게 나타난 성령강림사건입니다. 유대 사람들이 보고 ‘이방 사람들도 성령을 받는다’고 깜짝 놀랐다고 했습니다.

성령받는데 왜 놀랍니까? 

유대인들에게만 성령이 임하는 줄 알았는데 유대인이 아닌 로마 사람에게 성령이 임해서 놀란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 나타난 내용입니다.

고넬료는 로마 군인입니다. 정복군의 백부장이지만 분명 이방인입니다. 

여러분, 한 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고넬료는 로마 군인으로서 유대 땅에 와서 식민지 관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로마군의 장교로서 그는 당연히 로마 황제에게 충성하고 로마에서 섬기던 우상이 있고, 문화가 있었습니다. 

그 로마가 세상에서 최고다 라고 교육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한 긍지로 살아가던 이 로마 장교가 종교에 관한 한은 피정복지인 예루살렘 종교가 옳다고 믿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바른 하나님이라고 생각해서 자기네 속국의 종교인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입니다. 

더 나아가 고넬료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0:2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구약적인 신앙인으로서 거의 완벽하게 경건한 생활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특별한 은혜를 베푸셔서 천사를 만나게 해 주십니다. 

천사의 음성을 듣고 천사의 지시대로 그는 욥바에 사람을 보내어 베드로라고 하는 사람을 청합니다. 

저는 이 장면을 상상할 때마다 감격합니다. 베드로와 고넬료를 비교해 보시지요. 베드로는 갈릴리 어부입니다. 예수님을 3년 따라 다녔다고는 하지만 아마 턱수염이 더부룩한 초라한 행색을 하고 있었을 겁니다. 시쳇말로 볼품없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높은 자리에 있는 고넬료가 이 볼품없는 촌사람을 모셔옵니다. 

모셔 와서는 예를 다합니다. 깍듯이 정중합니다. 그래서 온 집으로 더불어 준비하고 기다리다가 들어설 때에 모두가 엎드려서 경배를 합니다.  

순간, 본디 남 앞서기를 좋아하고 우쭐대기 잘하는 베드라이지만 황송해 합니다. 고넬료의 경배하는 자세가 너무도 경건해서 26절 “베드로가 일으켜 

이르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하고” 

보십시오. 이 고넬료가 지금 베드로를 보고 있는 것입니까? 눈으로는 갈릴리의 어부 베드로를 보지만 그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고넬료의 베드로를 맞아들이는 자세가 그러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넬료는 말합니다. 33절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예배드리는 시간, 설교듣는 시간이 바로 그와 같은 시간이어야 합니다. 

‘목사님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나는 여기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그리고 들으면서 마음으로는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고넬료가 베드로 앞에서 취한 자세, 이것이야말로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합니다. 그런데 그 내용은 

43절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사함을 받는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이것을 신학적 용어로는 케리그마라고 합니다.

이 케리그마적 복음을 전하는 순간, 오늘 성경에 보니

‘이 말을 할 때에’ 44절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한 다음’이 아닙니다. 하는 중입니다. 

실로 굉장한 말씀입니다. 성령이 바로 이 시간에 임했습니다. 

말씀이 전해지고, 성령이 임하고, 그 순간 마음의 문이 열립니다. 편견도 아집도 문화적 장벽도, 심지어는 언어의 장벽까지도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말씀이 마음 속에 쏙 들어옵니다. 

그러면 그 말씀에 전인적으로 응답하게 됩니다. 안할 수가 없게 됩니다.

이 사실을 두고 오늘 사도행전은 저들이 방언을 했다고 기록합니다. 

방언이 무엇입니까? 언어의 장벽을 넘어서 복음이 소통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들이 다 깨닫게 되고 받아들이게 되고 믿게 되더라는 말입니다. 

베드로는 지금 아람말(시리아어)을 하고 있는데 고넬료는 로마 사람입니다. 알아들을 턱이 없는데 알아듣습니다. 성령이 임하여 방언을 했다는 것입니다. 방언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보통 많이 인식하는 고린도전서 14장에 나오는 ‘신비방언’과 

오순절 성림 강림 때와 오늘 등장하는 ‘지역방언’이 있습니다. 

오순절에도 예수님의 제자들이 설교를 했고 각 나라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나라 말로 들었습니다. 그 많은 언어의 장벽이 다 헐렸고 마음과 뜻이 다 통해버렸습니다. 방언했다는 장면은 바로 그런 장면입니다. 

 

사랑하는 새하늘교회 교우 여러분!

설교란 무슨 문자를 따지고 무슨 이치를 따질 문제가 아닙니다. 논리적인 차원이 아닙니다. 내 마음에 오는 감격입니다. 내 마음에 오는 생명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내 생명을 걸고 응답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알아듣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우리 개신교에서는 성경중심적인 신학을 전개합니다.

종교개혁의 정신입니다. Sola Scriptura. 

오직 성경만이 권위의 기초요 중심입니다. 

그리고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규범이 성경입니다. 

특별히 중요한 것은 성경의 해석자는 성경이라는 사실입니다. 

성경 자체가 성경의 해석자다. 이것이 개신교의 특징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를 소중히 여깁니다.

디모데후서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성령의 영감으로 성경이 기록되었고 성령의 조명이 있을 때에 성경이 바르게 해석되며, 성령이 빛을 비추어서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킬 때에 우리는 성경을 깨닫습니다. Logos가 Rema로

어떤 분들은 너무 조급하게 생각해서 성경을 읽을 때에 빨리 이해하려고 애를 씁니다마는 여러분, 성경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읽어야 합니다. 

마치 여자가 생선을 졸이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생선을 졸일 때 다 양념을 한 다음에 은근한 불로 졸여야 한다고 합니다. 

약하게, 불을 약하게 하여 느긋이 익혀야 하는데, 성질 급한 사람은 불을 세게 해 놓고는 이리 뒤집고 저리 뒤집고 하다가 그만 생선의 모양을 다 버리고 만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에도 절대로 조급해서는 안됩니다. 

내 생각이 미치지 못했고, 내 인격이, 내 지식이, 내 영적인 성장이 아직 부족하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하는 것인줄 아시고 겸손한 마음으로 읽으시기 바랍니다. 이리 뜯어맞추고 저리 뜯어 맞출 생각마시고 그대로 읽으십시오.

그렇게 읽어나가노라면 성령의 감동을 받다 성경이 내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어떻게 보십니까?

신학자 칼 바르트는 말합니다. ‘Words of God wait for us in the Bible’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 안에서 우리를 기다리신다.

지금 내가 성경을 읽고 있지만 내가 읽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지금 성경을 통하여 나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부지런히 읽으십시다.

그리하면 그 말씀이 나를 사로잡고 나를 붙들고 나를 인도하십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무엇이 소중합니까?

여러분이 이 세상을 떠날 때에 자식이 위로가 되겠습니까?

재산이 위로가 되겠습니까?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에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이 말씀뿐입니다. 

이 말씀만이 내 생명을 보호하시고 나를 인도하십니다. 

오직 이 말씀에 위탁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갑tl다.

그리고,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에 내가 읽고 감동받은, 내게 성령으로 말씀하시던 바로 그 말씀 그 구절이 나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이 귀하고 귀한 말씀에 우리 인생을 온전히 의탁하게 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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