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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하시는 일(요한복음 9:1-7)

  

 

    하나님이 하시는 일, 요한복음 9:1-7, 400장

 

출애굽기 26-32장

 

영국 어느 시골 마을에 부모님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 고아가 된 두 형제가 살았습니다. 열심히 살아보려고 했지만 며칠을 굶고 나니 배가 고파서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형제는 궁리 끝에 옆집 할아버지는 양을 수백 마리나 가진 부자니 그 집에서 양이 한 마리쯤 없어진다고 해서 별로 티도 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는 몰래 담을 넘어가 새끼양 한 마리를 훔쳐다가 오랜만에 주린 배를 채웠습니다. 포식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서투른 도둑질이 발각되어 형제는 꼼짝 못하고 붙들려서 처벌을 받게 되었는데 이 할아버지가 아주 고약한 사람이라 이 형제들 이마에다 ‘양도둑’이라는 화인을 찍어버렸습니다. ‘ST’ ‘Sheep Thief’

동네 사람들도 다 그것은 너무하다고들 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세월은 흘러서 형제들은 어른이 되었습니다. 형은 생각하면 할수록 그 할아버지가 너무 미워서 그 동네를 떠나서 다른 마을로 다른 마을로 전전하고 살았지만 늘 불만과 원망이 많았습니다. 

게다가 사람들이 자꾸만 물어봅니다. 이마의 ST가 뭐냐고, 그 뜻을 알기만 하면 사람들은 그를 외면합니다. 끝내 그는 분을 품은 채 죽었습니다.  

한편 동생은 생각합니다. ‘양 도둑질한 것도 사실이요 도둑놈된 것도 사실이다, 도둑놈 보고 도둑놈이라 하는데 뭐가 잘못인가?’하고는 착하고 진실하게, 부지런하게 한평생을 살면서 아이들을 사랑해서 온 동네 아이들이 이 할아버지 집에 모여서 놀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아이가 자기 할아버지에게 물어봅니다. ‘할아버지, 옆집 할아버지 이마에 ST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무슨 뜻이예요?’

할어버지는 그 할아버지의 과거를 다 알지만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너희들이 보는 바와 같이 그 할아버지는 참 좋은 분이시다. ST는 Saint 성자라는 뜻이다.’ 

여러분, 양도둑이라고 못 박은 그 화인이 성자로 바뀌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차이는 죄의 실제를 인정하느냐 안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죄는 죄대로 사실입니다. 그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것을 변명합니다. 

이것 때문이다, 저것 때문이다, 변명하기도 하고 합리화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어찌 되었든지 죄는 죄입니다. 도둑질은 도둑질입니다. 

죄는 죄다, 하나님 앞에 죄다, 그것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죄를 인정한 때에 진정한 회개가 일어나고 진정한 회개 속에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된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어느 불행한 사람의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이 사람은 나면서부터 소경으로 태어났습니다. 세상의 온갖 귀한 것들을 바라보고 감격할 기회를 박탈당한 채로 태어났습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이 사람은 날 때부터 소경으로 태어나서 쭉 길가에 앉아 구걸하는 거지로 살아왔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분명한 것은 자기 잘못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유를 모릅니다.

아버지가 잘못한 것인지, 어머니가 잘못한 것인지, 이유를 모릅니다.

또 한 가지 미래에 대한 보장도 없습니다. 

이렇게 불행하게 출발해서 한 평생을 불행하게 살아갈 뿐입니다. 

스스로는 아무 책임도 잘못도 없이 평생토록 이 고생을 해야 합니다. 

누군가가 던져주고 가는 동전 한 닢, 그 것에만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살아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생각 없이 살아가는 것처럼 불행한 일은 없습니다.

철학자 니체가 말했습니다. “살아야 할 이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갈 수 있다” 

그렇습니다. 살 이유가 있으면 무슨 수로든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살아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철저하게 무의미한 나날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그를 괴롭히는 일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평가입니다. 사람들이 수근거립니다. 

사람들이 그의 고난, 눈 못 뜸을 보고 신학적 토론의 주제로 삼았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는 대로 ‘뉘 죄 때문입니까? 본인입니까? 부모입니까? 

왜 이사람은 불행해 졌습니까?’ 까닭을 묻는 것입니다. 

자, 이 불행한 사람을 앞에 놓고 이것이 할 말입니까?

여러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안 그래도 괴로워 죽겠는데 남들이 내 불행을 놓고 이러쿵저러쿵 추상적인 논쟁이나 벌이고 있으니 이 얼마나 참을 수 없는 모욕입니까?  그래서 참으로 비참한 사람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을 잘 보면 저들은 구체적인 대책은 없고 추상적인 토론만 할 뿐입니다. 무익한 논쟁을 벌입니다. 

유대인들은 보통 고난은 죄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누구의 죄 때문이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제자들은 예수께서 병 고치시는 것을 여러 번 목격하지 않았습니까? 예수께서 능력 있으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주여, 이 사람을 고쳐 주시옵소서. 이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셔야 하겠습니다.’하고 말해야 되겠는데 그런 말은 한 마디도 없고 토론, 시비만 하고 있습니다. 참 맘에 들지를 않습니다.

이것이 예나 오늘이나 이 사회의 문제입니다.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슨 문제가 닥치면 조용히 주님 앞에 나아와 무릎 꿇고 간구해야 하는데, 

왜 그 문제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왜 그렇게 말들이 많습닊까?

목사님, 이 문제만 해결하고 신앙생활 열심히 하겠습니다. 말이 됩니까? 

예수님이 아직 무덤에 그냥 머물러 계십니까?

그 분은 부활하셔서 지금도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살피시고 우리들을 위해서 중보하시고 직접 돕고 계십니다. 이 사실을 믿으십니까? 

그런데 왜, 내 문제만큼은 내가 먼저 해결하려는 우를 범하고 계십니까?

 

오늘 본문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어떻게 응답하고 계시는가를 살펴 봅시다. 

예수님은 이 문제를 철학적 난제가 아닌 하나님의 사역으로 보십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보시면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먼저 생각하십니다. 

우리들은 문제를 보고 분석하려고 하지만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경륜을 먼저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버림 받은 이 소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보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그의 신앙 고백 가운데서 늘 이러한 사실을 이야기합니다.

골로새서 1:25 “내가 교회의 일꾼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예수님서도 그것을 보십니다. 이 사람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큰 경륜이 있다, 하나님의 하시고자 하시는 일이 있다, 하십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이 사람의 불행의 원인을 과거에 묻지 않고 미래에서 해답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누구 때문입니까, 부모 때문입니까, 본인 탓입니까... 이것은 전부 과거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문제는 물질을 잃어 버렸기 때문이 아니요, 건강을 잃어 버렸기 때문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소망을 잃어 버렸기 때문에, 용기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당하는 이 현실을 통하여 하나님의 큰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소경을 보면서 과거의 원인 분석에 급급했으나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나타내실 미래적 의미를 생각하십니다. 

우리는 과거에 매입니다. 무엇 때문에, 누구 때문에 라고. 

여러분, 과거 이야기는 이제 그만합시다. 

누구 때문이었는지, 무엇 때문에 불행해졌는지 아무리 두고두고 시비해 보아야 이 추상적인 이야기는 끝이 나지 않습니다. 

이제 쓸데없는 변론은 버리시고 미래적인 하나님의 그 신비한 경륜, 그 구속사적 의미를 깊이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은 이 현실을 통해서 앞으로 무엇을 얻을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그 경륜을 깨닫는 순간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입니다. 고난이 나에게 새로운 기회가 되고, 높은 차원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요셉은 어린 나이에 형들에 의해서 팔리어 노예로 갑니다.

노예생활, 감옥생활 말할 수 없는 13년의 고생을 치렀지만 그가 애굽의 총리가 되면서 가정을 구원하고 민족을 구원하게 됩니다. 

다니엘이 사자굴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그가 사자굴에서 나올 때 얼마나 영광스럽게 되었습니까? 

사도 바울이 억울하게 빌립보 감옥에 갇힙니다. 그러나 그가 감옥에서 나올 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합니다.

얼마나 통쾌하고 멋진 happy ending 입니까! 

 

오늘 예수님은 이 소경의 고난을 창조적인 기회로 삼으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특별한 기회로 만드십니다. 

인생의 기회는 성공으로 오기보다 실패로 오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고난은 기회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닥친 역경을 통하여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역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는 모든 형편, 모든 상황이 다 나름대로의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관계 안에서 하나님의 하시고자 하는 일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로마서 8:28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아무리 불행한 여건이라도 이 소경이 예수님을 만났기에 놀라운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하는 것이 이처럼 중요합니다. 

만남의 관계,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 속에서 창조의 기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나는 순간 예수께서 그에게 믿음을,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저는 본문 4절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를 읽을 때마다 늘 감격합니다. 우리가 하여야 하는데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모로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그렇습니까?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한다. 

결과에 상관없이 수단이 올바르지 못하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크리스찬들의 삶의 태도가 되어야 합니다. 

가나안 정복, 하나님의 방법으로 했을 때 승리.

절실한 기도제목을 가지고 기도하다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응답하여 주실 때가 있습니다. 응답을 받으면 보통 끝이라고 생각들 하고 샴페인을 터뜨리지만 그때부터 더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일을 이루려면 하나님의 방법,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문제는 응답은 하나님께 받는데 문제 해결은 내 방법대로.

 

자, 여러분들 예수님께서 그를 붙잡고 오늘따라 참 이상한 일을 하십니다.

보통은 눈을 만지시며 눈을 뜨라고 하시는데 오늘은 그게 아닙니다.

씻으면 눈을 뜨게 된다는 말씀도 없으시고 침을 뱉어서 흙을 이겨서 눈에 바르십니다. 여기서 눈을 씻으라 하지 않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십니다.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이 사람 눈에 진흙을 으깬 채로 더듬더듬 실로암까지 내려갑니다. 

마음 속에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말씀에 순종해서 갑니다. 저는 이 사람의 믿음을 높이 평가합니다. 

여러분들 아시다시피 시각장애자는 귀가 밝습니다. 청각이 아주 예민합니다. 보지 못하는 대신에 잘 듣습니다. 옆에서들 비아냥 대는 소리를 다 들었을 것입니다. 눈에 진흙을 바른다고 눈이 떠지나?

그런데 실로암까지 가서 자기 손으로 눈을 씻자 눈이 떠지게 된 것입니다.

참으로 위대한 믿음입니다. 그는 모든 불합리한 것을 참았습니다. 

모든 비난도 참았습니다. 모든 의심도 극복했습니다. 오직 조용하게 위대한 믿음으로 위대한 순종을 했습니다. 그러자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5: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순종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샤마’입니다. 이 말의 원뜻은 ‘듣는다’입니다. 

사무엘은 곧 ‘샤마엘’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이것이 사무엘입니다. 

우리도 그 사람 참 말 잘 듣는다 하면 그냥 청각으로 듣는다는 얘기가 아니지요, 그 말을 들어 순종한다는 뜻입니다. 

말 잘 듣는다, 안 듣는다는 행동이지 귀로 듣는 것만 말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듣는 마음, 인생을 바로 사는 철학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이 시각장애자도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눈이 떠지는 기적을 경험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우리는 살아가면서 생각지도 않은 고난을 당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왜 이런 일이 있어야 하는지 그 원인을 알 수가 없을 때가 많습니다. 도대체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고난이라고 하는 현실은 있습니다.

지금 당하는 역경이 아무 의미 없는 고난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나는 그 의미를 모르고 있으나 하나님께는 의미가 있습니다. 

나는 목적 없는 고난을 당하는 것 같으나 하나님께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대책이 없으나 하나님께는 대책이 있습니다.

주님께 이 문제를 가지고 나아옵시다. 

그리스도와의 바른 만남이 있는 순간 우리는 다 깨닫게 될 것이고 깨닫는 순간 우리는 다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와의 바른 만남과 온전한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게 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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