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기 싫어하거든, 데살로니가후서 3:6-12, 찬송 580장
레위기 14-20장
오늘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마치시고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종려주일입니다. 그리고 오늘부터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고난주간은 종려주일에 시작하여 그 다음 주일인 부활주일에 끝이 납니다.
주일에 입성하시고, 월요일에 성전정화를 하시고, 화요일에는 감람산에서 여 러 가지 말씀을 하셨지만 수요일의 행적은 성경에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목요일에는 최후의 만찬과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시다 가룟 유다의 배반으로 잡히셨으며, 금요일에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고, 토요일, 안식일에는 무덤 속에 계시다가, 주일에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의 부활 이후 유대인들은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반면,
우리 기독교인들은 부활하신 날인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예수께서 돌아가신 금요일은 성 금요일이라 하여 금식을 함으로써
그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가능하신 분들은 모두 금식함으로써 그 고난에 동참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33년의 생애를 사셨습니다. 사생애, 공생애
30년 동안은 요셉의 아들로 목수의 일을 도우며 생활하셨습니다.
그 후에는 공생애라고 부르는 마지막 3년을 사시게 되는데,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음으로 사역의 시작을 알리시고 그 후 백성들의 병을 치료하시고,
가르치시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이 공생애 3년 중 가장 중요한 기간은 마지막 한 주간, 종려주일부터 부활주일까지의 일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오늘, 종려주일에 예루살렘 성으로 승리의 입성(Triumphal Entry)을 하셨습니다.
승리의 입성이라고는 하지만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오직 하나,
죽기 위해서였습니다. divine appointment.
예수님이 죽으려고 이 땅에 오신 것처럼 여러분들도 교회에 다른 목적을
가지고 오시면 안 되고 죽으려고 오셔야 합니다. 죽어야 삽니다.
죽어야 별다른 세상, 즉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 예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오실 때 수천 명의 군중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부르며 예수님을 환영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그 예루살렘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종려주일을 맞이하여 주님을 이 시간 우리들의 마음에 영접하는 시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마태복음 10:40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를 영접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인격이 달라집니다.
누구와 함께 어울리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인품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돈을 영접하면 돈의 종이 됩니다. 권력, 학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라고 하였습니다. 자녀됨이 모든 것을 이깁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들 모두가 종려주일을 맞이하여
주님을 내 마음의 중심에 뜨겁게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게 되기시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같이 읽은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전도하다가 유대인들이 일으킨 소동 때문에 데살로니가를 떠납니다. 그리고 베뢰아와 아테네를 거쳐 고린도로 갑니다.
고린도에서 데살로니가의 교인들을 생각하면서 쓴 첫 번째 편지가 데살로니가전서입니다. 신약성경 스물일곱 권 가운데서 제일 먼저 기록된 성경이
데살로니가전서입니다.
그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조용히 자기 일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편지인 데살로니가후서에서도 12절에서 다시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 “조용히 일하여”라는 말은 여러 가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간단히 쉽게 말하면 말은 조금 하고 일은 많이 하는 사람들입니다.
일 안하는, 못하는 사람들이 말이 많습니다.
오늘 본문이 들어있는 데살로니가후서는 바울 사도가 데살로니가교회에
보낸 두 번째 편지입니다.
그 당시 성도들은 예수님이 금방 재림하실 것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자기들의 생전에 재림이 이루어질 것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에 ‘예수님이 곧 재림하실 터이니 일할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일하지 않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11절에 보면 데살로니가교회 교인들 가운데 일하지 않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했는데 이 사람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일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예수님이 금방 재림하실 텐데 힘들게 일을 해서는 무엇 합니까?’하며 문제를 일으키며 돌아다녔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답을 주기 위해 기록한 것이 바로 데살로니가후서입니다.
그들은 이중으로 잘못을 저지른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느 날에 재림한다고 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에 크게 어긋나는 일입니다.
그 다음, 예수님이 재림하니까, 말세가 되니까, 휴거가 되니까 일할 필요가 없다, 대단히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곧 재림한다는 것을 알았으면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더 성실하게, 더 열심히 해야 합니다.
직장인은 더 열심히 출근해야 합니다. 학생은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다가 재림하신 예수님을 만나야 칭찬을 받을 수 있습니다.
스피노자가 한 말 “내일 지구에 종말이 와도 나는 사과나무를 심겠다.”
베렌도 침레교회의 고 안이숙 사모님의 찬송시입니다.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하루 살아요. 불행이나 요행함도 내 뜻대로 못해요. 험한 이 길 가고 가도, 끝은 없고 곤해요. 주님 예수 팔 내미사, 내 손 잡아주소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는 것이 바른 삶입니다.
믿는 우리들은 노동을 축복으로 여겨야 합니다.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일하기를 지겨워합니다. 왜 일하냐고 물으면 입에 풀칠하기 위해 일한다고 합니다.
죽지 못해 억지로 한다고 대답합니다. 아닙니다. 일이야말로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골로새서 3:23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칼빈의 직업소명설, “occupation is calling”.
영어의 직업이란 말은 소명이라는 말과 뜻이 같습니다.
아담과 하와도 에덴 동산에서 일을 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야기는 창세기 3장에 나오는데 그 앞에 창세기 2장 15절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경작하며”는 영어로는 work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에덴 동산을 다스리며 지키는 일을 하게 했습니다.
에덴 동산에는 처음부터 일이 있었습니다.
일이 있었기 때문에 낙원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일이 있는 곳은 낙원이고 일이 없는 곳은 지옥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비참한 것이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오늘 하루 어떻게 보내나? 어떻게 시간을 죽이나?’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영어에서는 killing time이란 단어가 있습니다.
기독교의 가장 기본적인 계명인 십계명 중 4계명을 보면,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물론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안식일은 엿새 동안 힘써 일하는 것을 전제로 하여 잘 지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그냥 일하라고 한 것이 아니라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하라고 했습니다.
엿새 동안 힘써 일한 사람만이 안식일도 잘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일이야말로 하나님이 주신 복 가운데 복이요, 신성한 것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열심히 일하는 모범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바울은 전도자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육체적인 노동을 해 가면서 전도하는 일을 했습니다. 현대적인 용어로는 자비량이라고 합니다.
7절과 8절을 보시면 “어떻게 우리를 본받아야 할지를 너희가 스스로 아나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무질서하게 행하지 아니하며, 누구에게서든지 음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 말도 데살로니가전서 2장 9절에서 이미 한 말입니다.
“너희 아무에게도 페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전도할 때 힘써 일하면서 전도했습니다.
바울은 천막 제조업자였는데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머물며 전도할 때도 이 일을 계속했는데 그렇게 한 이유가 9절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주어 우리를 본받게 하여 함이니라”
즉 사람들에게 ‘이렇게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본을 보이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이제 10절에서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이렇게 명하지 않았느냐?’ 하면서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그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이 말은 자본주의 경제의 기본 원리를 명쾌하게 밝히고 있는 말입니다. 성도들은 바울이 보여준 모범을 본받아서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어야합니다.
그래서 찬송가 580장에서 “일하러 가세 일하러 가 삼천리 강산 위해 하나님 명령 받았으니 반도강산에 일하러 가세‘ 했습니다.
이 찬송가의 작사자는 남궁 억 선생입니다.
남궁 억 선생은 고종황제의 통역, 내부 토목국장, 오늘날로 말하면 건설부장관을 지낸 분인데 강원도 홍천 보리울이라는 곳에 학교와 교회를 세우고
무궁화를 보급하고 스스로 거름통을 메고 밭에 가서 일을 했습니다.
남궁 억 선생은 스스로 일하는 모범을 보였습니다.
남궁 억 선생이 이렇게 평민들과 어울려 일하는 것이 친척들 사이에 큰 문제가 되었다고 합니다. 일가친척들은 남궁 억 선생을 심하게 비난했다고 합니다. 땀을 흘리는 것을 천하게 여기는 것이 우리나라 상류사회의 전통이었는데 기독교는 땀 흘리며 일하는 것이 소중한 것을 가르치는 새로운 전통을 세웠습니다.
우리 나라에 기독교가 전해진 지 약 120년 동안 기독교가 국가에 큰 공헌을 했다는 점에 대하여 일반 모든 학자들도 다 크게 인정을 하고 있습니다.
기독교가 이 나라에 공헌한 내용을 네 가지로 분류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가 교육입니다.
둘째가 여성에 대한 지위를 향상시킨 것입니다.
셋째가 모든 우상숭배와 미신에서 완전히 벗어나 자유함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의 공헌 네 번째가 근면한 삶을 살도록 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대로 우리 조상들 중 양반들은 일을 하지를 않았습니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선교사들이 여름에 땀을 흘리며 테니스를 열심히 하니까 양반들이 그것을 보고서 점잖지 못하게 그게 무슨 짓이냐고 그런 것은 하인들에게나 시키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일을 하는 것 자체가 천박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 땅에 와서 일을 하는 것이 복된 일임을 알려 주었습니다. 선교사들이 와서 영농을 가르쳐주고, 가축을 먹이고, 오늘 우리가 땀 흘려 일하는 것이 축복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건강하게 일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잠언서에서 집중적인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잠언 10:4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
잠언 12:24 “부지런한 자의 손은 사람을 다스리게 되어도 게으른 자는 부림을 받느니라”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일하는 것을 복으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열심히 일하시는 모범을 보이시기 바랍니다.
“조용히 일하여”라는 말에는 이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조용히 자기 일을 하여 성경에 약속된 많은 복을 받고,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칭찬 받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