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12:7-10, 족한 은혜, 438장
창세기 48-50장, 출애굽기 1-4장
지난 주부터, 항상 살을 빼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비만이라는 것이 죄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넋놓고 있으면 내 몸에 딱 달아 붙어서 잘 떨어지질 않습니다.
그리고 사람으로 하여금 포기하게 만듭니다.
살이 찌니까 점점 살 뺄 자신이 없어지고 해도 안될 것 같아 시작도 못하게 만드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작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시작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시작할 때 하나님께서 동행해 주시면서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다니엘서 1장 8절에 보면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뜻을 정하였다,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뚜렷한 뜻과 확정된 생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살아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세속적인 모든 것을 거부합니다. 왕이 좋은 음식을 먹으라고 했지만 ‘아니오 나는 그런 우상의 제물 같은 것 안 먹겠습니다.’ 하였습니다. 모든 세상 유혹을 다 거절하고, 그 다음에 그는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의 지혜만 구했습니다.
저나 여러분 모두에게 이러한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할 때마다 여러분들은 어떤 기준으로 선택합니까?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들, 사업, 직장, 배우자 등 현실적인 문제를 선택할 때 어떤 기준으로 선택합니까? 솔직히 꽤 고민이 됩니다.
믿음대로 하려니, 신앙적인 기준을 따르려니 손해 볼 것 같고, 현실을 너무 모르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괴테는 유명한 ‘태초에 갈등이 있었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아무 고민 없이 가뿐하게 선택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렇게 고민하다가도 결국 신앙적인 기준을 가지고 선택하는 사람, 하나님은 바로 이런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바로 이런 순간에 우리의 진짜 신앙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내가 내 기준으로 알아서 선택하겠다, 이것은 ‘내가 책임지는 삶’입니다.
반대로 나 아닌 하나님의 기준으로 선택하겠다, 이것이
‘하나님이 책임지시는 삶’입니다.
그래서 가장 큰 행복은 믿어지는 것입니다. 남들은 다 못 믿겠다 해도 나는 믿어집니다. 남들이 이 모양 저 모양으로 별 이야기를 다 해도 나는 믿어집니다. 전적으로 믿어집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는 사람, 이 사람이 제일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믿음은 확실히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심으로 믿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합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안 믿겠다는 사람 믿게 할 수 있습니까?
그 많은 조건, 많은 설명이 믿음을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안 믿어지는 걸 믿게 하려고 많은 설명을 동원해 보아도 지식은 얻을 수 있어도 믿음은 생기지 않습니다.
구구한 많은 설명으로 믿음이 생기는게 아니다, 이 말씀입니다.
토레이라고 하는 미국의 유명한 목사님이 있습니다. 그의 부흥회에 참석한 어느 여자 분이 찾아와서는 이렇게 고민을 털어 놓습니다.
“목사님, 저는 교회에 다닌지도 오래 되고 부흥회에도 많이 쫓아다녀 봤는데 아직도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목사님이 지혜롭게 대답하십니다.
“돌아가셔서 이제 다른 기도는 다 그만두고 집중적으로 단 한 가지 기도만 하십시오. ‘하나님, 나 자신을 알게 해주세요. 내가 어떤 사람입니까? 나라는 사람을 알게 해 주세요.”
여인은 돌아가서 열심히 그런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 있는 자기모습이 보이는데 얼마나 추하고 더러운지, 만신창이었습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온통 더럽고 추하고, 도대체 고개를 들 수가 없었습니다. 그 추한 모습을 보고 몸부림을 치고 울었습니다.
그 여인은 다시 목사님에게 찾아와 “제가 제 모습을 알았습니다. 이제는 어떻게 할까요?”
목사님이 대답합니다. “이제는 십자가를 보여주세요.”라고 기도하십시오.
여인은 이제 “하나님, 십자가를 보여 주세요.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게 해 주세요”라고 집중적으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많던 죄짐이 다 벗어지고 깨끗한 흰옷을 입은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거기서 그는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깨닫게 되고, 자기 자신이 너무 소중한 하나님의 딸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래서 구원의 확신이 있는 참 하나님의 딸이 되었다고 합니다.
할 수 있다 하신 이는
오늘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의 은혜적인 인생관이 잘 설명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는 은혜를 은혜로 accept, 받아들여야 은혜입니다.
아무리 큰 사랑이 있더라도 내가 그 사랑을 받아들여야 사랑입니다.
9절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사도 바울은 은혜를 은혜로 받아들이는 순간, 크게 기뻐했습니다. 그 기쁨으로 충만하게 살았습니다.
사도 바울의 위대한 점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생각하는 은혜와 내가 생각하는 은혜, 이게 상반될 경우가 많습니다. 자, 내 은혜가 무엇입니까?
내가 보통 생각하는 것은 거의가 다 인간적일 때가 많습니다.
병든 것은 은혜가 아닙니다. 병들었다가 나아야 은혜입니다.
실패하는 것을 은혜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실패했다가 성공해야 ‘아 은혜받았다’고 합니다. 우리가 은혜라고 생각하는 것은 대체로 현재적이고, 육체적이고, 물질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인간의 욕망을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주로 이런 은혜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은혜가 더 화끈하게 왔으면 좋겠다 하고 생각하는데 반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은혜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것입니다. 온전하고, 신령하고, 형통케 하는 것입니다.
좀 더 나아가서는 나 자신이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가고, 그리스도인의 온전한 인격에 도달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은혜입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은혜를 내 은혜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들 아시다시피 사도 바울이 그렇게 저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가 생각하는 은혜라는 것이 그저 잘 살고, 오래 살고, 건강하고, 복받고, 출세하고... 하는 세상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은 적어도 ‘복음의 길을 열어주십시오, 선교의 문을 열어 주십시오, 보다 많은 사람에게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해서 불같이 교회가 일어나고 온세계가 복음화하는 그런 모습을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 바울이 생각했던 은혜입니다.
그래서 그는 명예도 구하지 않고, 지식도 구하지 않고, 부귀도 구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하여 필요하니, 최소한 건강을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구했습니다.
오늘 8절을 보니 바울이 세 번 간구했다고 말씀합니다.
이 ‘세 번’이라는 것에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 나라 말에도 삼세번이라는 말이 있듯이 랍비들의 교훈에 의하면 자식이 아버지에게 뭘 요청할 때, 무슨 소원을 말할 때 ‘저걸 내게 주세요’라고 했다 합시다. 한 번 이야기합니다. 아버지가 거절합니다. 두 번 이야기합니다. 거절당했습니다. 이어서 세 번 거절당했다면 이젠 더 구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 거절 속에 ‘너는 이것을 가져서는 안된다’는 아버지의 뜻이 있습니다.
이제는 아버지의 뜻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의 신앙입니다.
사도 바울은 특별히 시간을 정하고 기도한 것 같습니다.
뭐 금식을 했는지, 철야를 했는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는 말씀합니다. 육체의 가시, 사단의 사자 이것을 빼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구하였습니다.
사단의 사자, 육체의 가시가 무엇인가, 이것이다, 저것이다 많은 학자들이 구구하게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그 나름대로 일리가 있습니다마는
갈라디아서 4:14에 의하면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라고 고마워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렇게 추리해 봅니다.
갈라디아 교회에 가서 설교할 때 강단에서 말씀하다 말고 그만 발작이 일어나 꺽꺽 소리지르면서 거품을 물고 쓰러져 버렸습니다. 이게 될 법한 소리입니까? 이 자리의 여러분도 한 번 상상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제가 그렇게 쓰러진다면 어떻게 되겠나. 목사가 그냥 쓰러진 것이 아니라 꺽꺽 대며 거품을 품으며 쓰러졌다. 아름답지 못할 것 같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시험에 들겠습니까?
그래서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거 빼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구했다는 것입니다.
다른 건 몰라도 이거 하나만은 하나님 꼭 제거해 주십시오.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세 번 간구하였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세 가지로 응답하십니다.
하나는 ‘그래라, 네 소원대로 될 것이다’ 곧 ‘그래라’하고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기다려라. 아직 미숙하니 좀더 기다려야겠다. 때를 기다려’
기다리시라는 응답인 것입니다.
세 번째는 ‘생각을 바꾸라. 발상을 바꾸라. 뜻을 바꾸라. 네 생각을 버려라’ 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 번째 응답을 오늘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사도 바울은 이때 주님의 은혜를 내 은혜로 받아들입니다.
“My grace is sufficient for you”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네가 고민하고 있지마는 그것은 내 은혜다.
그대로가, 네가 가진 불편한 몸, 그대로가 내 은혜다라고 하십니다.
왜? “너에게 은혜를 은혜되게 하고, 너를 겸손하게 만들고, 너를 그리스도 안에서 강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그 가시이다.
그런고로 내 은혜, My Grace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하나님께서 때로는 우리에게 시련도 주시고 실패도 주시고 고통도 주시고 아니, 더 나아가 질병까지 주십니다.
아직도 내가 생각하는 은혜에 집착하고 있습니까?
내가 생각하는 은혜만이 은혜입니까?
내 뜻, 내 소원, 꼭 여기에 매여 달려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이제는 잘 이해가 되지도 않고 때로는 납득이 가지 않더라도 그의 은혜를 나의 은혜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의 은혜, 인정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 모두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런 귀한 음성을 듣게 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