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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선택(창세기 13:8-13)

 

    잘못된 선택, 창세기 13:8-13, 521장

 

전도서 11-12장, 아가 1-5장

 

헬라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행복이란 소유에 있는 것도 아니고, 성취감에 있는 것도 아니다. 

먼저 행복의 첫 번째 조건은 자원해서 자발적으로 하는 일, 그것이 행복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억지로 하는 것, 강요되어서 하는 일은 다 불행한 것입니다. 

두 번째는 ‘온 몸으로 함께하며 동참할 때 행복이 있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음악을 들으면서 행복합니다. 그러나 연주하는 사람이 더 행복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귀한 성가대의 찬양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들어서 행복합니다마는 성가대원들은 부르면서 행복합니다. 

그런데 누가 더 행복할 것 같습니까? 저분들이 훨씬 더 행복할 것입니다.  

그와 같이 우리는 선한 일을 할 때, 의로운 일을 할 때 그거 좋지 하고 말만 하지 말고 몸을 바쳐서 봉사하라, 이것입니다. 

거기 진정한 행복이 있는 것이다. 했습니다. 

 

사람이란 어찌 됐건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인간에게는 주어진 자유의지가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추구하고 사느냐, 내가 무엇을 선택하고 사느냐, 그에 따른 운명을 내가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선택에 대하여 책임을 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집을 나서기 전

 

창세기 12장 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하십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보이지 않는 그 하나님을 선택하고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지시할 땅으로 떠납니다. 그것이 아브라함의 신앙이었습니다. 

동으로 가든 서로 가든 개의치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선택하고 그가 인도하시는대로 살아가기로 작정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는 롯이라는 조카가 있었습니다. 

그 조카 롯은 삼촌이 좋아서 삼촌, 아브라함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가는대로 따라갔습니다. 동으로 가면 동으로, 서로 가면 서로, 애굽으로 가면 애굽으로 따라갔습니다. 그리고 오늘 다시 벧엘로 돌아옵니다. 

어쨌든 그는 아브라함이 선택한 길을 그대로 따라 갔습니다. 

아브라함을 좋아했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 땅이 좁아서 용납할 수 없을 만큼 소와 양이 많이 있었다고 오늘 본문은 말씀합니다. 삼촌네와 함께하기에는 땅이 좁으니 두 가정이 갈라져야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조카 롯에게 말합니다.

‘나를 떠나라. 이제는 네가 그만큼 컸으니 나를 떠나라’

이래서 두 가정이 갈라지는 이야기가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아브라함은 바로 이 시간에 또 다시 택함받은 자의 모습으로 중요한 선택을 합니다. 무엇이 더 중요하냐, 하는 것입니다.

삶에 있어서 지혜 중에 가장 큰 지혜가 우선순위(priority)의 분별입니다. 

무엇이 중요하냐, 그것을 결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생각했습니다. 

화목이 중요하다. 화평이 중요하다. 우리 다투지 말자, 그래서 그는 조카에게 양보를 합니다. 무릇 양보 없이 화평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화평은 상당한 대가를 필요로 합니다. 

내가 손해 보지 않고 화평은 없습니다. 화평을 원하고 화평해야겠다고 하면서도 내 잇속을 차리려고 하니, 양보가 없고 화해가 없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많은 사람들이 단결해야 되겠다, 하나 되야 되겠다, 하면서도 하나가 안 되는 것을 봅니다. 손해 볼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남북통일

I am comfortable

조금도 양보할 마음이 없으니 하나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아브라함은 크게 양보합니다. 

이렇듯 크게 양보할 수가 없습니다. 보십시오.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너 가지고 남는 거 내가 가지마‘ 큰 양보입니다. 

이 마음이 참으로 복된 자의 마음이요 선택받은 자의 마음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양보, 해 보신 적 있으십니까? ‘다른 사람 다 좋은 거 가지고 나서 남는 거, 궂은 일, 그거 제가 하겠습니다.’ 

 

사무엘상 16장을 보면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 붓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다윗은 형들이 다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사무엘 앞에 나아가고 있을 때 혼자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다 양보하고 말입니다. 

이 마음이 복 받는 마음입니다. 아브라함이 이렇게 양보하고 있습니다. 

‘네가 가지고 나서 남는 거 내가 가지마’ 어찌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그에게는 신앙생활이 더 중요했습니다. 거룩한 생활이 더 중요했더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동이면 어떻고 서면 어떻습니까? 산지면 어떻고 평지면 어떻습니까?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대수롭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고 내가 경건생활을 지켜갈 수가 있다면 이것으로 더 바랄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그렇듯 너그럽게 양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왜 멸망했습니까? 그 까닭은 먼저 죄 때문입니다.

물자가 부족했던 것이 아닙니다. 모두들 풍요한 생활을 했습니다.

개인이건 민족이건 국가건 죄 때문에 망합니다. 로마 제국이 망한 것이 왜 입니까? 너무 풍요하게 살다보니 죄가 관영하게 되어서입니다. 

노아의 홍수 때도 그렇습니다. 

창세기 6:13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리고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망한 것입니다.

죄가 있다고 다 망하는 것은 아닙니다. 회개하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지자의 말씀이 줄기차게 전해졌습니다마는 끝내 회개하지 않아서 망했습니다. 

회개하라! 잘못했으면 회개하면 180도 turn해서 돌아오는 것.

돌아온 탕자

 

마지막으로 의인 없음으로 망했습니다. 

몇 명의 의인이라도 있으면 그 의인을 보시고 사해 주실 것입니다.

창세기 18장 22절 이하를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간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의인 오십인 만 있으면 살려달라고 하다가 마지막에는 10명 만 있어도 멸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 냅니다. 나로 인해서 내 가족이 살고, 내 주변이 살고, 내 나라가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아브라함에 비해서 롯은 어떠했습니까? 

성경을 읽으면서 이 조카 좀 얌체다, 그런 생각을 합니다. 삼촌이 그렇게 

말하면 ‘무슨 말씀입니까, 삼촌 먼저’ 이래야 되는 것 아닙니까? 세상은 상식적이지 않습니다.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내 각본대로 되지 않습니다. 

이 사람, 그런 말이 없습니다. 그 너그러운 삼촌을 똑바로 쳐다보고는 ‘요쪽을 내가 갖겠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물이 넉넉하니 비옥하여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다고 성경이 말씀하는 그 쪽을 넙죽 선택합니다. 

이 선택하는 기준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적입니다. 

자기잇속만 생각합니다. 삼촌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오직 부요함만 생각했습니다. 10절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이라고 했습니다. 보는 것만 생각했습니다. 

본다는 것 중요합니다. 무엇을 보느냐,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합니다. 

화려함을 보는 것, 외형을 보는 것, 겉을 보는 것, 안됩니다. 

사람도 겉만 보아서는 안됩니다. 속을 보아야 합니다. 

겉만 보다가 많은 실수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롯은 물질의 풍요함만 보았습니다. 

인간을 보지 않았고 인간의 도덕성도 보지 않았습니다. 

외적인 번영, 화려한 세계, 풍요만 생각했더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는데, 믿기는 믿는데 돈밖에 몰랐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는 것도 그저 부자 되게 해 주십사. 였습니다.

부자되게 해달라고 몇 년을 기도했는데도 부자가 못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설교 시간에 목사님이 기도는 구체적으로 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10억만 주세요, 딱 10억만 주세요”

그런데 몇 년 기도해도 또 응답이 없더랍니다. 그래서 다시 고쳐서 기도합니다. “10억을 주시면 십일조를 바치겠습니다. 그러니 10억을 주세요”

그런데 그것도 응답이 없더랍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기도합니다.

“그러면 먼저 십일조 떼시고 남는 거 9억만 저 주세요”

시종일관 그저 돈 밖에 모르는 것입니다. 

모든 가치관의 기준이 거기에 있습니다. 이 관이 문제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가치관이 바뀌어야 합니다. 세계관이 바뀌어야 합니다. 

오늘 롯은 화려한 것만 보고 풍요만 보았습니다. 물질적인 세계만 보았습니다. 거기서 큰 실수를 하게 됩니다. 

 

누가복음 17장 32, 33절 “롯의 처를 기억하라. 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롯의 처는 멸망과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 경고를 무시하고 소홀히 여겼습니다. 

그러면서 여전히 세상 것을 사랑했습니다. 

오늘도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끌어안고 있는 것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못해서 문제입니다. 

롯의 아내의 신앙이 이와 같았습니다. 발걸음은 앞을 향해 나아가는데 마음에 뒤에 있었습니다. 몸은 소돔과 고모라를 벗어났지만 영은 아직도 그 죄악의 도시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도 그러했습니다. 

몸은 애굽에서 나왔으나 마음은 애굽을 떠나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깨끗하고 시원스러운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어중간하게 지낼 것입니까? 

좀 더 시원하게, 유쾌, 상쾌, 통쾌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는 없겠습니까? 

 

오늘 말씀을 보면 참으로 기막히고 충격적인 장면이 나옵니다. 

12절 “롯은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여기에 엄청난 문제가 있습니다. 자기 장막에 머물지 않고 소돔과 고모라, 그 죄악의 도성으로 자꾸 옮겨 갔습니다. 

이처럼 일단 세속 문화에 발을 들여 놓은 롯이 점점 죄악의 깊숙한 세계로 빠져 들어 갔듯이 보이는 현실의 풍요와 화려함에 눈이 먼 자는 마치 부드럽게 집어 삼키는 수렁과도 같은 죄의 심부로 빠져들어 가고 맙니다. 

성경을 조금 더 깊이 연구해 보면 롯에게도 아브라함과 함께 살 때는 얼마간의 믿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롯도 그 땅은 죄악의 땅이요 언젠가는 망할 수 밖에 없다는 것도 인정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거기서 떠나지를 못했습니다. 

이러면 안되지, 하면서 그 길을 갔습니다. 

종교개혁자 칼뱅은 이렇게 말합니다. “롯은 장차 낙원 속에서 살 것이라고 상상했으나 지옥의 심연으로 빠져들어가고 있었다”

사람의 불행 중 가장 큰 불행이 뭐냐하면 불행할 줄을 알면서도 그쪽으로 계속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래서는 안된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한 번만 더, 딱 한 번만 더, 금년까지만, 한탕만 더... 잘못된 길인줄 알면서 그쪽으로 계속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잘못된 선택이 멸망을 초래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롯은 멀리서 소돔과 고모라를 바라보았지만 그 속은 보지 않았습니다. 

그 죄악도 보지 못했습니다. 아니, 뒤에 깨달았어도 그는 돌이키지를 못했습니다. 이 땅은 망할 것이다, 생각하고 벌떡 일어나서 나와야 되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는 다 잃어버렸습니다. 사랑하는 아내도 죽어버렸습니다. 

왜 이렇게 된 것입니까? 그는 선택을 잘못했습니다. 

그리고 잘못된 선택을 수정하지 못했습니다. 돌이키지를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나는 무엇을 선택하고 살아왔습니까? 후회없으십니까? 끊어야 할 것은 

빨리 끊고, 돌이켜야 할 것이라면 지금 돌이켜야 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선택하고 환경과는 관계없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행복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됨을 깨닫고 하나님의 자녀다운 바른 선택을 해나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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