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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하지 말라 (야고보서 2:1-9 )

 

 

    차별하지 말라, 야고보서 2:1-9, 218장

 

창세기 41-47장

 

우리나라에 처음 기독교가 들어왔을 때 한 교회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그 교회에 열심히 출석을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분의 직업은 백정이었습니다. 이 분은 백정이라는 비록 천한 직업을 가졌지만 예수를 잘 믿고 열심히 봉사하였습니다. 때가 되어서 교회가 장로 선거를 하게 되었고, 이 백정 교인이 장로 후보가 되었습니다. 또한 공교롭게도 그 지역에서 유명한 양반 교인도 장로 후보가 되었습니다. 두 사람이 나란히 선거를 치루었는데 그만 양반 교인은 떨어지고 백정 교인이 장로가 되었습니다. 

백정이 장로가 되어 임직을 하고 나니, 양반 교인들이 그냥 있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저 천한 백정 놈에게 장로님이라고 부를 수 있느냐, 우린 못하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양반 되는 분들이 의논을 해서 교회를 나가 또 하나의 다른 교회를 세웠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들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노무현이란 고졸 변호사가 대통령으로 당선 되고 나니 자기가 something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난리가 났었습니다. 이회창.

노무현 대통령이 안검하수가 있어서 수술을 받고 나니 노무현 대통령 눈은 수의사가 수술을 해야 한다고.

오늘 날 윤석열 대통령 지지자들의 주장, 이재명이는 안되.

없는 집안에서 자라고 중앙대 법대를 나왔기 때문

그래서 윤석열 탄핵을 막아야.

 

오늘 야고보 사도는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고 우리에게 권면해 주고 있습니다. 그는 한 가지 예를 드는데 2절과 3절입니다. 

“만일 너희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방문했다고 치자”라고 합니다. 이 금가락지를 낀다는 것은 사회 저명인사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가 아름다운 옷을 입었다는 것은 고관대작이나 아주 재물이 많은 부유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럴 때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동시에 그 회당에 아주 가난하고 더러운 옷을 입은 누추한 사람이 방문을 했는데, 그 사람에 대해서는 아무도 관심도 쓰지 않고 아무데나 앉으라고 하든지 내 발 밑에 앉으라고 한다면 어찌 그것이 하나님의 교회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하는 것입니다. 

 

1절 말씀을 읽습니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아멘. 

예수를 믿기 전 믿음이 없을 때는 세상적인 기준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세상에서야 돈 많은 사람이 최고고, 권력있는 사람이 최고고, 좋은 차 탄 사람이 잘 대접 받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제 우리에게 믿음이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믿음이 있는 사람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차별해서는 안된다고 오늘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좋은 사람 좋고, 싫은 사람 싫은 것은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지 않은가?”라고 생각되십니까? 오늘 말씀이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외모로 차별해서는 안 되는 첫 번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차별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똑같이 대우하셨습니다.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무엘상 16:7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초대교회 당시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이 아주 극심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방인과 식사도 하지 아니하고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지도 아니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베드로에게 와서 깨지게 됩니다. 

베드로가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머물면서 다락에 올라가서 기도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한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늘에서 보자기 하나가 내려오는데 그 보자기 안에는 아주 부정한 짐승의 고기들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것을 먹으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깜짝 놀라서 “내가 이렇게 부정한 것을 어떻게 먹어요? 못 먹습니다.” 했더니,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깨끗하게 했으니 걱정하지 말고 먹어라.” 하나님은 세 번이나 동일한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베드로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몰라서 고민하고 있는데 마침 이방인 백부장인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베드로의 거쳐하는 집에 도착을 했습니다. 

“우리 백부장께서 베드로 사도를 모셔오라고 했습니다. 우리 집에 심방 오셔서 말씀 전해주시고 기도도 해주십시오.”라고 전했습니다. 

베드로가 이방인 백부장 집에 가서 말씀을 증거 할 때에 성령의 은혜가 임하는 놀라운 역사를 보게 됩니다. 

이 놀라운 일을 경험한 베드로는 사도행전 10:34, 35절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인간은 태어날 때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 가치있고 존귀한 자입니다. 그런데 그 이유는 우리에게 있는 가능성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보실 때 과거를 보시지 않으시고 현재와 미래를 보십니다. 

지금은 별 볼 일 없는 사람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만 임하면 그가 거듭남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선한 도구로 쓰임 받는 것을 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람을 외모로 차별해서는 안 될 이유는 우리가 은혜로 선택받았기 때문입니다. 

5절 말씀을 읽습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나님의 선택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신 조건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잘나서, 잘생겨서, 공로가 많아서, 업적이 많아서, 착한 일을 많이 해서 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를 불러 주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10에서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가 구원받은 것, 내가 교회의 직분자가 된 것, 내가 교회의 목사가 되어 설교하는 것,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 하나님의 은혜로 부름 받은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6-29절에서 사도 바울은 초대교회 교인들이 부르심 받을 때 어떤 모습이었는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말씀합니다. 

초대 교회 교인들도 다 그들이 어려움 당할 때 부름 받은 것입니다. 

사도들도 보십시오. 베드로, 안드레, 요한은 갈릴리 어부 출신들입니다. 

어부라는 직업은 그 당시에 가장 천한 직업에 속했습니다.  

또한 마태복음을 기록한 마태는 세관에서 일하던 세리였습니다. 

세리는 그 당시에 자기 동족의 피를 빨아먹는 매국노처럼 그렇게 멸시받는 사람들이었지 않습니까? 이런 사람들을 택하셔서 위대한 사도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사람을 볼 때 그의 모습 그대로 판단하시면 안 됩니다. 

‘아 저럴 수도 있겠구나. 나도 저렇게 부족한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이 은혜로 불러 주셨는데, 저 형제도 이제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게 된다면 새로운 인생으로 거듭날 수 있겠지.’하는 소망을 가지고 격려하고 기도해 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사랑의 명령 때문입니다. 8절과 9절 말씀을 봅니다.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한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죄하리라.” 

오늘 성경에 보니까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법을 최고의 법이라고 말합니다.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와서 묻습니다. 

“선생님, 가장 최고 되는 법이 무엇입니까? 최고되는 계명이 무엇입니까?”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동시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 두 가지 법은 공존하는 법입니다. 둘이면서 하나인 것입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 사람이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느냐 하는 것은 그가 형제를 얼마나 사랑하느냐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남을 깔보고 우습게 알고 무시하는 사람이 어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법, 그것은 바로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법입니다.

레위기 19:18에서도 하나님은 이 계명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그런데 우리가 형제의 허물을 덮어주고 그를 하나님의 귀한 존재로 차별 없이 대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긍휼을 베푸는 자가 되어야 됩니다. 

오늘 본문 13절은 말씀합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긍휼의 법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음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를 향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가 형제에게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면 나도 너희에게 긍휼을 베풀 수 없노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무엇이라 말합니까?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깊이 생각해 볼 문제가 있습니다.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우리나라에 와있는 외국인들에게 어떻게 대우하냐에 따라서 우리가 외국에 나가서도 어떤 대우를 받느냐가 달려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제시대 때, 얼마나 어려운 삶을 살았습니까? 우리 민족도 먹을 것이 없어서 하와이로, 러시아로 이주하고, 저 중국 땅에 가서 나그네 삶을 살았습니다. 그랬던 우리가 우리나라에 와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그렇게 학대하고 멸시한다면 얼마나 잘못된 일입니까? 

차별은 하나님이 원하는 뜻이 아닙니다. 교회 안이든 교회 밖이든 어떠한 차별이라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또한 동시에 특별대우도 없습니다. 직분자든 평신도든 누구나 동등한 것입니다. 

 

백인들만 모이는 어느 미국 교회가 있었습니다.

한 흑인 아이가 그 교회에 들어가려 하다가 입구에서 제지를 당하여 쫓겨났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가 교회당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엎드려 울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얘야, 너는 왜 거기서 울고 있니?”라고 물으셨습니다. “제가 저 교회에 들어가고 싶은데 못 들어오게 해서 그래요.”라고 그 흑인 아이가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 아이를 안고 쓰다듬으시면서 “괜찮다. 울지 말아라. 나도 그 교회에는 들어가지 못했단다.”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우리가 전도 대상자를 정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을 차별하지 마십시오. 그가 누구이든지, 부유한 사람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병든 사람이든, 건강한 사람이든, 어린아이든, 대상을 제한하지 마십시오. 이런 사람이 와야 우리 교회에 어울리는데라는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그가 누구든지. 그 영혼은 다 소중한 겁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런 사람들을 원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도 바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바로 그 사람을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피 흘려 돌아가셨기 때문에 우리도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차별 없이 교회로 초청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차별없이 함께 예배드리고 함께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릴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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