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절, 로마서 9:1-5, 582장.
기독교는 고난과 더불어 확장되는 종교라고 하는데 한국교회도
지난날 고난을 통해서 기도하는 체질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 민족이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눈물로 기도하면서 이 어려운 난국과
역사의 굴곡을 헤쳐 나왔습니다. 이것이 우리 한국교회의 전통입니다.
하나님은 나라를 위한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모세의 기도를 들으셨고,
느헤미야와 에스더와 다니엘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한국기독교는 애국심을 가지고 현실에 참여한 종교입니다.
그 대표적 예가 바로 1919년 3.1운동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06년 전 1919년 3월 1일
자주 독립을 외치며 우리 조선 민족이 모두 궐기했던 날입니다.
이번 주 토요일은 3·1절 106주년 기념일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06년 전 1919년에 자주 독립을 외치며 우리 조선 민족이 모두 궐기했던 날입니다.
일본은 1905년 을사보호조약으로 우리나라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1910년에는 조선총독부를 설치하면서 한일합방으로 나라를 빼앗아 갔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국제적인 관심은 한반도가 일본에 귀속된다 할지라도 일본이 남하해 오는 러시아의 세력을 막아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는 입장이었기에 한일합방에 문제를 삼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은 나라를 빼앗기고 자유를 잃었음에도 호소할 데가 없는 불행한 민족이 되었습니다. 3.1운동은 이러한 우리 민족이 민족적 자주생존권을 주장함과 동시에 자유를 선언한 운동입니다.
독립선언문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吾等(오등)은 玆(자)에 我(아) 朝鮮(조선)의 獨立國(독립국)임과 朝鮮人(조선인)의 自主民(자주민)임을 宣言(선언)하노라.”
독립선언문을 작성하고 배포하며 만세를 부를 때만해도 우리 민족은 하나였습니다. 잘 사는 사람, 못 사는 사람이라는 계층 간의 갈등도 없었습니다.
그때는 우리 모두가 하나였습니다.
옛날 한국초대교회 성도들은 가난하고 무식했지만 순수한 열심이 있었습니다. 말씀대로 성결하게 살려고 발버둥을 쳤습니다. 유혹이 와도 눈앞의 이익 때문에 부정을 저지르지 않고 신앙의 양심을 지켰습니다.
그 때만 해도 교회가 나라를 걱정하였는데 이제는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게 되었습니다.
요즘 우리에게 자주 사용되는 외래어 중에 ‘노블리스 오블리제’란 말이 있습니다.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뜻하는 말입니다.
이 말은 원래 초기 로마시대에 왕과 귀족들이 보여 준 투철한 도덕의식과 솔선수범하는 정신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특히 귀족 등의 고위층이 전쟁에 참여하는 전통은 더욱 확고했는데 이러한 귀족층의 솔선수범과 희생에 힘입어 로마는 고대 세계의 맹주로 자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6·25전쟁 때에도 당시 미8군 사령관 밴플리트의 아들은 야간폭격 임무수행 중 전사했으며, 대통령 아이젠하워의 아들도 육군 소령으로 참전했습니다. 중국의 모택동이 6·25전쟁에 참전한 아들의 전사 소식을 듣고 시신 수습을 포기하도록 지시했다는 일화도 유명합니다.
저는 그런 의미에서 우리 기독교인들도 특별한 신분을 가진 사람들, 또 특권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찬송가 340장 후렴 가사를 보면 “예수 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거 많도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인들이 참으로 이 사회에서 남보다 더 희생하고, 더 봉사해야 할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때때로 사회에서 교회나 기독교인들에 대해서 비판적인 안목을 가지신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교회에 대해서 이런 잘못된 평가를 합니다.
“기독교인들은 사회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자기 자신의 안일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기독교인들은 현실에는 관심이 없이 오직 죽어서 가는 천국에만 관심이 있다” 이렇게 왜곡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그렇게 증언하지 않습니다. 한국기독교는 누구보다도 애국심을 가지고 있고 현실참여적인 종교입니다. 그리고 역사의식을 가진 종교입니다. 저는 그 대표적 예가 바로 1919년 3.1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당시에 자신의 몸을 던져 나라를 위해 살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독교인이었습니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중에 기독교인 16명, 불교에서 2명이 대표로 서명했습니다.
이것만 봐도 한국에 기독교가 얼마나 우리 동족의 현실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고 참여하고 있는가를 우리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최남선, 이상재 누구 누구 하지만 3·1절을 대표하는 인물은 유관순입니다.
그를 가리켜 한국의 잔 다르크라고 합니다.
유관순은 1902년 11월 17일 천안군 병천 마을(아우네 마을)에서 유중권씨와 이소제씨 사이에서 3남 2녀 중 차녀로 태어났습니다. 그녀가 태어난 유씨 가문은 의병장의 가문이었고 교육가의 가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의 가문은 신앙의 가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영특한 유관순은 사 애리사(Alise H. Sharp) 선교사의 주선으로 1916년 14살의 나이로 이화학당 보통과 3학년에 편입하여 공부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누군가를 만나 감화와 감동을 받는 것이 인생을 살아가는 데 너무나 중요한데 유관순은 이화학당에서 공부할 때 두 사람으로부터 큰 감화와 감동을 받았습니다. 정동교회의 손정도 목사(초대 해군 참모총장을 지내신 손원일 제독의 부친)와 이화학당의 박인덕 선생입니다.
손정도 목사는 정동 강단에서 하나님 사랑과 나라 사랑을 늘 강조하였는데, 유관순은 2년 동안 그의 설교를 들으면서 그의 가슴이 하나님 사랑과 나라 사랑으로 불타게 되었습니다.
또 박인덕 선생은 이화학당에서 애국애족의 정신을 학생들에게 심어주던 분이었는데 동생과 같은 유관순을 극진히 사랑하고 격려했습니다.
일본은 만세시위에 가담했던 사람들을 돈으로 매수하거나 회유하여 감형으로 출옥을 시켜 주었으나 유관순은 매수도 회유도 되지 않았습니다.
유관순은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고 일본의 갖은 잔악한 술책에 저항하다 마침내 1920년 10월 12일 18살의 꽃다운 생을 마쳤습니다.
그는 신앙을 지키다가 죽은 순교자였고 나라의 독립을 이루려다가 죽은 순국자였습니다.
유관순은 비석이 없어 무덤을 찾을 수 없고, 유품하나 남겨 두지 않은 채, 오직 수의를 입은 사진 한 장만을 남겨두고 우리 곁을 떠나갔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죽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파한 선교사들은 교회가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게 하기 위하여 ‘정교분리’의 원칙을 내세워 기독교인들이 민족운동에 가담하는 것을 철저히 막았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신앙적인 행위가 아닌 것으로 잘못 생각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그 시대의 역사적 과제 해결에 무관심하거나 회피하는 것은 신앙인의 올바른 태도가 아님을 확신한 기독교인들이 신앙적 결단으로 3.1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애국과 신앙을 하나로 생각했습니다.
나라를 위해 죽는 것, 순국이 곧 순교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상재 선생이 감옥에 갇혀서 모진 고통을 치룰 때에 누가 이 일을 시켰냐고 매질을 할 때에 그는 시종일관 하나님이 시켰소라고 하고 만세 운동 본부가 어디냐가 하면 하늘에 있소 라고 당당하게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이 신앙고백이 한국 교회의 부흥의 뿌리가 된 것입니다.
이것을 잊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3.1운동은 신앙의 발로였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애국자가 되어야 된다고 말씀하고, 또 많은 믿음의 사람들은 그런 길을 살아갔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도바울의 글을 한번 읽어봅시다.
1절과 2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거하노니”
사도바울은 그 스스로가 하나님께서 그를 이방인을 위한 그릇, 사도로 택하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주로 유대인보다는 이방인들에게 복음 전하는 일에 더 매진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유대 땅에서보다 외국, 이방세계에 나가서 복음을 증거한 사도였습니다.
그런 사도바울의 마음속에 큰 근심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 근심과 고통은 자기 동족, 이스라엘을 향한 근심이고 고통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어느 곳에 가든지 먼저 유대인들을 찾아갔습니다.
사도행전을 읽어 보면 바울이 새로운 마을에 들어가면 먼저 유대인의 회당을 찾아가 거기서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에게 가서 복음을 증거하면 그들이 마음을 열고 그 복음을 잘 받아들이는데, 유대인들은 한결 같이 복음을 거부했습니다.
이것이 사도바울에게는 고통이요 아픔이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제 내 동족이 구원받을 수 있다면, 내가 어떤 대가라도 다 치룰 수 있다고 그렇게 고백합니다. 3절 말씀을 읽어봅시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다”
오늘 바울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나의 형제 골육 친척이 구원받을 수만 있다면 내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좋다”라는 것입니다.
내가 저주받아서 지옥 불에 던져지더라도, 내 동족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받을 수만 있다면 나는 그 길을 선택하겠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 동족을 위해서 너무 비통해하고 너무 가슴 아파하며 그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바울의 간절한 고백은 이제 10장 1절에서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바울은 소원은 오직 한 가지, 내 동족이 구원받을 수만 있다면 나는 무엇이든지 감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이 기도를 드린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출애굽기에 나오는 모세입니다. 모세가 십계명판을 받으려고 시내산 위에 올라가 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이 아론과 함께 금송아지를 만들고 춤을 추며 먹고 마시고 음란한 일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멸하시려고 할 때 모세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생명을 건 기도였습니다.
출애굽기 32:32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이것이 바로 모세의 마음이었고 바울의 마음이었습니다.
여러분! 기독교인들은 나만 잘되면 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이 크리스천입니다.
기독교인의 가장 큰 사명은 기도하는 사명입니다.
우리가 영적 파수꾼이 되어서 이 민족이 죄로 물들지 않도록 우리가 깨어서 기도하고 깨어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라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외국에 나가도 대한민국 여권만 가지고 가면 어디 가서도 대우를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이렇게 좋은 나라 속에서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을 때, 우리나라를 위해 더욱 깨어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대한민국은 참 특별한 민족 아닙니까? 우리가 늘 부르는 애국가를 보십시오.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이런 가사를 가진 국가를 가진 나라는 없습니다.
한국 초기 기독교의 찬송가 14장이 애국가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배시간에 애국가를 불렀습니다.
하나님이 이 민족을 축복하셔서 이렇게 우리가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은혜 안에 살게 하신 것이 주님의 은혜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그것을 잘 모릅니다. 하나님에 대한 고마움도 잃어버려가고, 국가에 대한 고마움도 모릅니다. 우리는 이것을 회복해야 합니다.
나라를 위해 기도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어느 역사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3.1.운동이 없었다면, 2차대전이 끝났다 하더라도, 우리는 일본에 편입되고 말았을 것이라고…… 아시겠습니까?
우리는 3.1.운동이 있었기에, 우리가 독립된 국가로 인정받게 되었다는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치지 않는 고통을 말하던 사도바울의 신앙으로 오늘도 이 나라를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라 사랑이 신앙으로 승화되어 믿지 않는 영혼들에게
새생명을 전해주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