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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의 고민(요나 4:1-4)

요나의 고민, 요나 4:1-4, 54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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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 7-1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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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설교 제목은 요나의 고민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이번 주 내내 나의 고민이 시작되었습니다. 살아가는데 기쁨이 사라졌습니다. 

뭔가 공허하고 불안해지는 겁니다. 하나님과의 대화가 끝긴 거예요. 

이럴 때 예전에는 기도원을 가서 해결을 받고 오곤 했는데 요즈음은 갈만한 기도원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기도하기 시작했는데 하나님의 응답은 새벽예배였습니다. 그래서 매주 목요일 6시반에 기도회를 열려고 합니다.

찬송하고 짧게 말씀 듣고 기도하고. 

교인분들 중에도 마음이 움직이시는 분들은 같이 동참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의 고민이 있는 분들은 같이 해결해 나가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4월 10일 6시 반에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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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문제가 많은데 그 문제를 분석해 보면 두 가지로 요약이 됩니다.

하나는 끝없는 욕심이고 다른 하나는 시기, 질투입니다. 

이 욕심과 시기 질투 때문에 나도 못 살고 남도 못살게 합니다. 

여러분 오늘 이 시간 내 마음 속에는 욕심과 시기 질투가 얼마나 남아 있는가? 잘 진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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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에 보면 선지자이긴 한데 하나님의 마음을 잘 모르는 선지자가 

등장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하심에 불만을 품은 선지자입니다. 

심지어는 하나님 잘못하시는 것이라고 화를 내고 하나님을 정죄하는 

못된 선지자, 그 이름은 요나입니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있지만 사랑이 없었습니다. 

율법은 있으나 은혜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기뻐해야 할 일에 화를 내고 있습니다. 

축제를 지내야 할 이 시간에 죽기를 소원합니다. 정말 못난 사람입니다. 

너무나도 어이없는 이 이야기가 오늘 성경에 등장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중에도 이런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괴롭히고, 자기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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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은 솔로몬 사후에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나누어지게 되었는데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많은 괴로움을 당했습니다. 

심심하면 쳐들어와서 포로로 잡아가고, 또 겁탈을 하곤 해서 북이스라엘에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혼혈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한 마디로 앗수르는 이스라엘에게는 원수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타난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입니다. 

그 수도에 죄가 관영하여 하나님께서 더는 보실 수가 없어서 

소돔과 고모라처럼 멸망시키겠다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심판 전에 요나에게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심판을 알리라는 겁니다. 여기서 오늘 하나님의 중요한 메시지를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 전에 선지자를 통해서 반드시 말씀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아모스 3:7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비록 애굽이건, 앗수르건, 바벨론이건 어디든지 먼저 선지자를 보내시어 

회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고도 회개치 않을 때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말씀하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듣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죄 자체 때문에 망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통첩을 받고도 회개하지 않음으로 망하는 것입니다. 개인도, 민족도,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질 때 회개하지 않음으로써 멸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니느웨에 가서 40일 후에 

망한다고 최후통첩을 하라, 하십니다. 

이렇게 마지막 경고를 하고 회개를 하면 용서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요나는 니느웨에 가서 외쳤다가 그들이 회개를 하면 그들도 구원받는 것이 너무 싫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니느웨가 아닌 스페인의 다시스로 도망을 가다가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서 사흘 동안 있게 되었는데 2장을 보면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회개를 하니 하나님께서 물고기로 하여금 토해내게 하고 니느웨로 가게 하신 것입니다.  

이제 니느웨 성에 와서 이제 그는 하나님께서 전하라고 한 메시지를 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전하긴 전하는데 “회개하시오. 그러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해야 되는데 그럴 마음이 없어 한다는 소리가 “40일 지나면 망한다, 40일 지나면 망한다”는 마지 못해 전하는 메시지였습니다. 

그런데도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왕으로부터 백성까지 재를 뒤집어쓰고 다 회개한 것입니다. 

그래, 우리가 죄를 많이 지었지, 이래서는 살아남을 수가 없지, 하고 다 회개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저들을 용서하십니다. 

요나는 이 점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못 마땅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시작을 보면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내 이럴 줄 알았어요, 합니다. 영 못마땅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원망할 뿐만 아니라 괴로워하고 싫어하다 못해 그 다음에는 죽기를 소원합니다. ‘나 이런 꼴 보고 사느니 죽고 싶습니다.’

죽을 사람들이 살아나게 된다면 잘 된 일인데, 니느웨 성이 회개하고 구원받는 것을 보면서 이런 꼴을 보느니 차라리 죽고 싶습니다. 합니다. 

요나가 이렇게 된 이유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 매우 중요합니다. 

대부분 우리들의 죄는 하나님의 마음을 제대로 읽지 못해 벌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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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한 번 봅시다. 탕자가 집을 나갔다가 돌아옵니다. 

거지가 되어 돌아왔지만 아버지는 그를 환영해서 잔치를 합니다. 

그런데 그럴 때 형은 못마땅해 합니다. ‘내 동생’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 이렇게 나옵니다.

이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창녀와 함께 먹어버리고 돌아왔는데 어째서 환영하는 것입니까? 아주 못 마땅해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내 아들이자 네 동생이 살아 돌아왔으니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합니다.

돌아온 탕자는 밖으로 나갔다 돌아왔지만 형이라는 사람은 집에 있으면서 아버지 마음을 괴롭힌 것입니다. 아버지 마음을 이해하려고 들지 않았습니다. 그는 또 하나의 다른 탕자인 것입니다. 

여러분,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며,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마음을 먼저 이해하여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내 생각, 내 뜻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먼저 이해하고 그 다음에 내 마음을 하나님의 뜻과 일치시키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헌신하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가야 할 길인 것입니다. 

그런데 요나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려고 들지 않았습니다.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인본주의적인 우리들의 심령이 

신본주의적으로 바뀌어 나가는 과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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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요나는 자기 생각에 집착해서 과거를 잊지 못합니다. 

자기가 본 손해, 자기 민족이 당한 굴욕, 여기에 꽉 붙들려 있었습니다. 

과거로부터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얼마나 앗수르가 우리나라를 쳐들어와서 다 짓밟아버리고 착취해가고 못살게 굴었는가’ 전쟁을 일으켜서라도 꼭 앗수르를 망하게 하고 싶다, 하던 차에 죄 때문에 망한다고 하니, 내가 손 안대고도 저절로 망한다고 하니 얼마나 잘 된 일인가, 통쾌해 하던 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여기에 있지 않았습니다. 자기 생각이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역사라고 할 때에 우리는 그것을 조용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반항하면 피곤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안하면 엉뚱한 일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해야 될 일을 즐거운 마음으로 정열을 기울여서 하면 피곤이 없는데 

하지 말아야 될 일을 하고 있으니 마음도 괴롭고 몸도 피곤한 것입니다.

오늘 요나는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찬양하고 감사해야 할 시간에 원망하고  죽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요나의 고민입니다.

깊이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그는 어이없게도 하나님을 정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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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제임스라고 하는 신학자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적 성숙단계를 네 단계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이 점점 자라서 높은 경지에 이르러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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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첫 번째 단계는 나 자신의 한계를 깨닫는 것이라고 합니다. 

내가 할 일은 이것뿐입니다. 나머지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실 일입니다. 

내가 할 일이 있고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my part가 있고 his part가 있습니다. 전하라 하시면 전하면 됩니다. 

그  다음 일은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고백은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549장)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자기 한계를 확실하게 인정하는 순간 신앙생활은 온전히 자유하게 됩니다. 

나는 내 할 일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 이상은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를 심판하든 벌하든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일입니다. 그것은 나의 문제가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내가 할 일을 하고 충성을 다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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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둘째 단계는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6:24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자기를 부인할 때 우리들 앞에 있는 새하늘과 새땅이 비로소 보이기 시작합니다. 내가 내 좁은 생각에 집착하는 것, 이것은 아직도 신앙생활 입문도 하지 못한 것입니다. 자기를 버리는 것, 이것이 신앙생활의 첫째 단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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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단계는 하나님의 큰 역사 속에 내가 있고 하나님의 큰 은혜 안에 내가 있다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섭리’라고 합니다. 그래서 믿는 우리들에게 우연이란 없습니다. 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하나님의 그 치밀한 계산 속에서 우리들의 삶이 영위되어 가는 것을 발견해 나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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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네 번째 단계는 영성의 극치, 영성의 핵으로서의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그리하여 세상의 모든 것을 사랑으로 보고, 사랑으로 듣습니다. 

불행히도 요나에게는 이것이 부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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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선교의 아버지로 추앙 받는 허드슨 테일러라는 유명한 선교사가 있습니다. 중국에 처음 선교의 문을 여신 분입니다. 

그분이 선교사역 하던 중에 동역자를 구하려고 고국에 돌아가 공고를 냈더니 선교사 지망생이 많이 모였습니다. 이들을 하나하나 면접해서 선교사를 선발하려고 하는데 그때 그는 이렇게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당신은 왜 중국에 선교사로 가려고 합니까?’

‘중국의 많은 영혼들을 제가 구원하기 위해서’

‘중국을 변화시키고 문명세계로 인도해야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거 참 좋은 생각이지만 그런 생각들을 가지고는 동기가 부족합니다.’

그랬더니 지망생들이 물어봅니다. ‘그러면 선교사님은 왜 중국으로 선교를 가십니까?’ ‘나는 중국사람들을 사랑합니다. 오로지 그 사랑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랑이 없는 선교 이것이 문제입니다. 

사랑이 없는 봉사, 원망으로 끝납니다. 

사랑이 없는 희생, 불평으로 끝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결혼 생활, 파국으로 치닫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장’이라고 합니다. 

1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설파합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여러분, 자식을 위해서 한평생을 산다느니, 남편을 위해서 한평생을 고생했다느니, 가정을 위해서 온 생을 바쳤다느니 하는 소리가 왜 나오는지 아십니까?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수고를 많이 하였지만 거기에 사랑이 없었습니다. 

사랑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 순종치 못하고 항의하였던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니느웨가 망하게 되었다가 구원을 받았으면 같이 기뻐해야 할 것 아닙니까? 축제 아닙니까? 

축제를 벌이고 감사해야 할 시간에 하나님께 원망을 하고 죽겠다고 합니다.

소위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해도 또 원망과 불평으로 끝나고 맙니다. 

자기중심적인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은 감사하고 찬송을 불러야 할 시간에 원망을 하고 절망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오늘 우리들에게 이 축제의 마음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로 그것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사람의 마음입니다.  

이 마음이 여러분들에게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깨달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헌신하며 같이 기뻐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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