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설교말씀

환상에 이끌리어(사도행전 16:6-10)

 

    사도행전 16:6-10, 환상에 이끌리어, 375장

 

민수기 22-28장

 

지난 주일 예배 후 제 책상 위에 고깔콘 3봉지가 놓여 있는 거예요.

김미경 집사님이 갖다 놓으셨다고, 그래서 저는 제 칠순 선물로 알고 

감사히 먹기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종류를 바꿔 가면서 계속 

먹고 있습니다. 김미경 집사님이 맛있는 케익과 떡을 준비해 주시고 사모님이 맛있는 도시락을 준비해 주신다고 하였으니 모두들 오셔서 같이 축하해 주시기 바랍니다. 

 

칠순 즈음이 되니까 몸에 여러 가지 반응이 오는데 의사 선생님이 답은 

오래 써서라고 해요. 인정할 건 인정해야, 

작년 10월에 거제도를 다녀오는데 갑자기 무릎이 잘 구부러지지를 않으면서 

구부리면 아픈 거예요, 그래서 우리 집 앞 정형외과에 갔는데 퇴행성 관절염이라고 해요. 그랬더니 오래 쓰셨잖아요. 나이 때문에 그래요

요즈음 제가 열심히 하는 운동은 탁군데요 며칠 전에 스매싱을 하는데 어깨가 잘 안 돌아가는 거예요. 또 그 정형외과에 갔더니 힘줄에 염증이 생겨서 그렇다는 거예요. 왜 그렇게 되냐고 물어 보았더니 답은 똑 같아요.

쓰실만큼 쓰셨잖아요. 살살 달래가면서 탁구 치세요.

 

오늘 이렇게 아프신 분들에게 아주 유용한 세브란스를 졸업하신 재활의학과 선생님, 윤성일 장로님이 하와이에서 오셨는데 특별 찬양 “나의 한숨을 바꾸셨네”를 해 주신다고 해요. 다 같이 커다란 박수로 환영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건강하게 살면 제가 잘나서 건강한 줄 압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하루 하루 건강을 지켜 간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언제 건강에 대하여 감사하느냐 하면, 아파서 병원에 입원해서야 비로소 건강했을 때가 얼마나 고마웠는지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평범한 중에 일상생활에서 받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는 별로 의식하지 못합니다. 

당연히 주어지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니 감사하지도 않습니다. 

무사하다는 것, 평범함 속에 하나님의 큰 은혜가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평상시에 환난을 막아 주시기도 하시고, 피해 가게도 하시고, 비켜 가게 하실 때에 우리는 이것을 은혜로 깨닫지 못합니다. 

꽝하고 부딪쳐야만 압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운전할 때 얼마나 많은 위험이 있습니까?

그런데 내 차가 부딪쳐야 비로소 지금까지 사고없이 산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구나 하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큰 사건에 깜짝깜짝 놀랍니다. 

그러나 사실은 평범한 중에 주신 은혜가 훨씬 크고 놀라운 것입니다. 

모름지기 이것을 의식하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무엘상 7장 12절을 보면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이르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사무엘은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감사하되 구체적으로 감사하면서  기념비를 세웁니다.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도우셨다, 얼마나 확실하고 귀한 간증인지 알 수 없습니다.

 

행복한 사람은 가진 것을 사랑하지만 불행한 사람은 갖지 못한 것을 사랑합니다. 우리들 가운데 이런 사람이 많습니다. 다른 사람은 내 처지가 가장 좋다고 하는데 나는 내 생에 대한 긍지가 없습니다. 불행한 사람입니다. 

행복은 깨달음과 정비례함을 알아야 합니다.  

고문할 때에도 정신을 잃으면 중단한다고 합니다. 정신을 잃어버린 사람을 때려서 무엇합니까? 징계도 깨달음이 있는 자에게 유효하지 깨달음이 없는 

자에게는 무효합니다. 

그러면 왜 깨닫지 못합니까? 깨달음이 없는 이유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각 안에서 물러날 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상대방의 생각을 수용하는 만큼 발전하게 됩니다. 

늘 자기 생각만 옳고 남의 말은 들을 줄 모르는 사람들은 발전이 없고 본인 자신도 강퍅합니다. 마음을 활짝 열고 듣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망할 때는 귀부터 먼다고 합니다. 듣는 귀가 없으면 망하는 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그 많은 말씀을 하시면서도 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라고 결론을 맺으십니다. 들을 귀가 있어야 듣습니다. 

 

그리고 깨달은 다음에는 은혜를 기억하고 기적의 현재성을 믿어야 합니다. 

예전에 기적이 있었다면 오늘도 일어날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그 역사가 결코 옛날 이야기일수 만은 없는 것입니다. 

내게도 똑같은 기적이 나타날 것을 믿어야 합니다. 

과거의 그 큰 기적 속에서 살아왔던 것처럼 앞으로 우리도 기적과 그 은혜 속에서 살아갈 것입니다. 

사람마다 근심 걱정하는 것은 어제의 기적의 뜻을 몰랐고, 설사 기적의 뜻을 알았다 하더라도 망각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왔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자 그런데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리스도인만이 가지는 특별한 고민이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가지는 고민과는 좀 다릅니다.

대부분 나를 향한 구체적인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고민합니다. 가야 합니까? 와야 합니까? 버려야 합니까? 아니면 취해야 합니까?

또 하나님의 뜻은 알지만 내 마음에 합당치 않을 때 고민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 뜻을 따를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 고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내 뜻이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입니다. 내 소원 그대로가 하나님의 뜻이었으면 좋겠다.

이 같은 욕심을 품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고는 있습니다. 

그러나 내 뜻과 욕심에 대한 미련을 떨쳐 버릴 수가 없습니다. 

교회 나와서 예배를 드릴 때에도 마음 한 가운데서 은혜를 받지 못하고 

고민에 붙들린 채 돌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 은혜를 받지 못합니까?

그는 ‘네가 하는 일이 옳다’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동의를 얻고자 예배를 드리는데 그런데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말씀을 들으면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내가 하는 일이 옳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 길과 내 뜻을 고치고 싶지도, 바꾸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나왔다가 더 큰 고민을 안고 떳떳하지 못한 마음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본문 말씀 가운데 7절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라는 말과 함께 10절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시도한다, 노력한다, 있는 힘을 다해서 애쓴다. 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대로 사도 바울은 노력형 인간이었지만 늘 마음을 열어놓고 

주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조심스럽게 살아갔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대해 민감했습니다. 

또한 그는 눈 앞에 닥치는 현실적인 사건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하고 주님의 음성을 기다릴 줄 아는 경건한 안목이 있었습니다. 

그의 서신 여러 군데에서 “주의 뜻이면 갈 것이다”

로마서 1:13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자신이 가려고만 하면 얼마든지 배를 타고 얼마든지 갈 수 있지만 그는 늘 순리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았습니다. 무리하지 않았습니다. 

길이 막혔을 때는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를 알고자 조용히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되는 순간에는 지금까지 경험했던 것, 시도했던 것, 계획했던 것, 수고했던 것을 모두 저버리고 과감하게 주님의 뜻을 따라서 모험의 길을 나섰습니다. 

 

오늘의 본문 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이 말씀은 결코 핍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매맞는 것이나 감옥에 갇히는 것 따위의 핍박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7절을 보면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

9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은 자신을 부르는 마게도냐 사람을 환상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길을 막으십니까? 반드시 다른 길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문을 닫으셨습니까? 반드시 다른 문을 열어놓고 계실 것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이것을 바로 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 점에서 민감했습니다. 영적인 지각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는 노력과 수고를 아끼지 않는 정열적인 실천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바울은 영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 문이 닫힐 때에는 어느 쪽 문이 열린 것인가, 이 길이 막힐 때에는 어느 쪽 길이 열릴 것인가 하고 하나님의 뜻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새로운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 때마다 환상이 작용합니다.

지금까지 애쓰고 계획하고 노력하던 바를 다 포기하고 큰 모험의 길을 나설 수 있었던 것은 환상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역사의 변혁을 일으킨 것입니다. 

 

리빙스턴은 원래 중국 대륙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자 계획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어떤 환상을 보고 아프리카로 갑니다.

한국 교회사를 보면 여러분이 잘 아는 언더우드 박사에 대한 기록이 나옵니다. 언더우드는 1884년에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자 인도 행을 결심합니다. 그래서 그는 인도어도 배우는 등 여러 가지로 준비를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주님의 음성을 환상 속에 듣습니다. 

“한국으로 가라” 그후 그는 한국이 어디에 있는가를 지도상에서 확인해 봅니다. 이것이 언더우드 박사가 한국에 오게 된 동기입니다. 그는 1884년 부활절 아침에 인천항에 첫발을 내림으로 한국 선교를 시작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가 내 뜻대로의 길을 간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환상을 따른 사람들입니다. 내 의견이나 계획을 깨끗이 포기하고 주님의 지시를 따를 수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이렇듯 환상을 따라가는 사람들에게는 좌절이 없습니다. 낙담이 없습니다. 오직 용기만이 있을 뿐입니다. 

왜? 만일 이대로 죽는다고 해도 그것은 주님의 뜻을 이루어가고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원래 아시아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계획을 세웠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환상을 따라서 아시아행을 포기하고 유럽으로 갑니다. 

이로 인하여 마침내 세계의 역사가 바뀝니다. 

 

오늘의 본문 10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현실적으로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환상에 끌려갑니다. 

이 소명에 끌려서 바르게 응답합니다. 이렇듯 환상을 따라서 바로 살 줄 아는 사람이 지혜의 사람이요, 은혜의 사람이요, 능력의 사람이요, 용기의 사람입니다. 

이렇게 영적인 민감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이끌리어 살아가게 

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