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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이 내려 오시니(사도행전 10:44-48)

   

 

     성령이 내려 오시니, 사도행전 10:44-48, 185장.

 

민수기 29-35장

 

어떤 사람이 넓은 사막을 정처 없이 방황하며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지고 있는 물이 다 떨어져 가고 있는 것을 알고 점점 불안해 하기 시작합니다. 빨리 오아시스를 찾아야 합니다.

그러다가 사람의 발자국을 발견하고는 ‘이제 살았다’고 소리를 칩니다.

발자국만 따라가면 살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따라가도 발자국은 끝이 없고 해는 점점 기울어 가고 있습니다. 그제야 그는 자기가 자기 발자국을 되밟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실망합니다. 

우리는 나름대로 똑똑하다고 생각하며 살아가지만 우리의 지혜는 그와 같은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믿는 우리들은 하늘을 바라보면 인도해 주시는 그 분이 있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인간이 무엇입니까?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 몸이 건강하다고 인간입니까? 지식을 많이 얻고 공부를 했다고 해서 그것이 인간입니까? 그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인간다운 인간이어야 인간이라는 말입니다. 

사람의 몸, 그것만 가지고는 인간이 아닙니다. 

그를 지배하는 이성이 건강해서 바른 판단력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그리고 그 이성과 감성을 주도하는 영혼이 건강하게 살아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가지고 있을 때에 우리는 인간이라고 합니다. 

시편 49편 20절에 보면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존귀하게 창조하시고, 존귀하게 여기는데 깨닫지 못하는 사람, 이 깨달음이라고 하는 기능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구원론은 성령이 임했다는 말부터 시작이 됩니다. 

사도행전 2장을 보면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강림한 날을 기념하여 예루살렘의 오순절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유대 사람들을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사도행전 10장은 이방인의 오순절이라고 하는데 로마의 백부장 고넬료라고 하는 사람의 가정에서 이루어진 역사입니다. 

고넬료에 대하여 사도행전 10장 2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 하더니”라고 했습니다. 

고넬료의 믿음을 4가지로 소개합니다. 그는 경건하였다,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했다. 백성을 많이 구제했다. 그리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했다. 

 

기도란 우리가 지켜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를 알게 해 주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길을 잃어 버려서 방황할 수 밖에 없는 인생이지만 

기도하는 사람의 미래는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유대인이 그렇게 사는 것은 당연하지만 고넬료는 이방인인 로마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그런 믿음이 귀한 것입니다.

아무도 그의 믿음을 보아 주는 이가 없고 알아주고 인정 하는 이가 없지만 하나님이 인정했습니다. 하나님이 보고 계셨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보고 계십니다. 내가 하는 모든 일 하나님이 보고 계십니다.

 

그러자 그가 기도하는 중에 주의 천사가 사람을 욥바로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는 환상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들 신앙 생활하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거나 환상을 듣게 되면 어떻게 합니까? 무시하면 성령은 소멸됩니다. 

그래서 부하 가운데 경건한 사람을 불러 하인 둘과 함께 욥바로 보냅니다. 마침 그때 베드로도 기도 시간이 되어 지붕에 올라가 기도 중에 환상을 봅니다. 하늘에서 보자기가 내려오고 부정한 짐승들이 그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데 잡아먹으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나는 결코 먹은 적이 없나이다. 그때 두 번째 소리가 들립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우리는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더러운 존재들이었습니다. 속된 존재들이었습니다. 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깨끗하게 해 주셨습니다. 본래 깨끗해서 깨끗한 게 아니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자, 이제 베드로가 하나님의 ‘묻지 말고 먹으라. 가라’ 하는 명령을 받아서  고넬료의 집에 갑니다. 묻지 말고 하나님께 너무 많이 묻지 마십시오.

베드로는 유대사람입니다. 이방사람과 상종하지 않고 뿐만 아니라 그 집에 가서 머문다거나 음식을 같이 한다거나 잔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가서 고넬료의 집에 머뭅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서, 그 주도하심 속에서 두 사람이 만납니다. 

그 만나는 역사가 너무나도 아름답습니다. 

고넬료는 로마의 백부장, 즉 고급 군인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갈릴리 어부 촌사람이 허름한 옷을 입고 들어 왔겠지요. 

들어설 때에 고넬료가 온 집안과 더불어 나가서 맞이합니다. 

26절을 보면 맞이할 때에 얼마나 간절하게 엎드려서 절을 했던지간에 베드로가 너무 죄송해서 일으키면서 “나도 사람이요 이러지 마십시오” 그럽니다. 

그만큼 경건하게 맞이합니다. 왜요?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 얼굴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외모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모셔오라고 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오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를 맞이하고 

그리고 고넬료가 하는 말입니다. 33절 “우리가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말씀하시지요.” 고넬료가 베드로 앞에 서 있지만 마음으로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는 지금 육의 눈으로는 베드로를 보고 있지만 영의 눈으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들으려고 합니다. 

바로 그런 관계를 카리스마적 관계라고 합니다. 카리스마틱 relationship

여기서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 사이에도 베드로와 고넬료 사이에 맺어졌던 것과 같은 카리스마적인 관계가 형성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성령으로 인한 것입니다. 

지금 이 시간도 보십시오. 여러분도 지금 제 이야기를 듣고자 여기에 나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지금 보기는 저를 쳐다보고 있지만 마음으로는 여러분은 분명 하나님께 마음을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해가 되고 감동이 되고 말씀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이 말씀을 들을 때에 성령이 임했습니다.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와 듣는 자 사이에 신령한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사도행전의 주제는 성령이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의 마음도 열었다는 것입니다. 

딱 한 번 만나서 말씀을 전했는데 듣는 사람이 예수를 영접합니다. 

빌립보에서 루디아도 그렇게 주를 영접했습니다. 성령이 마음 문을 열어서  낯선 사람을 만났어도 단 한 번 만나서 구원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집을 열어서 교회를 합니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어지는 거기에서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 보면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매우 귀중한 말씀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 

이 듣는다는 관계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들음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니까 말씀으로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말씀과 말씀의 관계, 말씀을 말하고 듣고 이런 관계를 인격적 관계라고 합니다. 인격적 관계란 말로 설득하고 감동하고 말과 말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대한 말씀, 그 말을 하고 그 말을 듣는 순간에 성령이 임했다. 여기서 중요한 사건은 말씀과 성령이 동시적으로 역사했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없다면 구원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성령이 없다면 그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지 않습니다. 

성령과 말씀이 함께 역사합니다. 성령과 말씀이 동시적으로 나타나서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순간 구원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삼중성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요한복음 1장 14절의 말씀처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홀로 고삭스 에게네토. 말씀이 육신을 입어 사람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나타났다. 그것이 바로 계시의 말씀입니다. 계시적 말씀. 

그 다음에 기록된 말씀, 그 예수에 대하여 기록된 말씀이 성경입니다. 

성경이라고 하는 그릇에 예수 사건이 담겼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이 말씀을 설교하고 선포하는 케리그마, 이것은 들려지는 말씀입니다. 

성령으로 잉태하여 세상에 오셨고 성령의 영감을 통하여 기록되어서 말씀이 되었고 오늘도 말씀을 들어서 성령의 역사로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직 성령으로만 말씀이 말씀되는 것입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성경 즉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연애편지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연애편지는 단순한 문자가 아니다. 연애편지는 읽으면서 그 애인의 얼굴을 바라보는 듯이 읽어야 한다.’ 

연애편지는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연애편지 속에는 사랑이 있고 마음이 담겼습니다, 마음. 그 사랑을 느끼고 마음을 읽어야 편지지 왜 이것은 이렇게 썼나, 왜 맞춤법이 틀렸나, 글씨가 엉망이고... 그건 아닙니다. 

 

그러므로 키에르케고르의 말에 의하면 이 편지를 읽을 때에 기쁨이 있고 

결국은 행복에 취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 하는 말씀을 듣습니다. 이 말씀에 취해서 모든 고난을 이기고 살다가 이 말씀에 의지하여 요단강을 건너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까? 

이 말씀에 충만해서 너무 감격한 나머지 죽음도 불사합니다. 

환난과 핍박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서 웃으면서 가는 사람이 바로 순교자가 아닙니까.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모델입니다. 

칼 바르트는 말합니다. Words of God wait for us in the Bible.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 안에서 우리를 기다린다. 참 좋은 말씀입니다. 성경 안에서 기다린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그리스도와 인격적 관계를 가집니다. 카리스마적 관계를 맺습니다. 

그러므로 잊지 말아야합니다. 내가 성경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내가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내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 약속이 있고 사랑의 증거가 있고 생명력이 있는 것입니다. 말씀이 능력으로 다가옵니다. 그 능력 안에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고넬료와 그 집은 기도응답으로 베드로를 영접했고, 베드로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령의 감동을 받아 구원 받을 뿐만 아니라 말씀에 붙들려  교회를 세우는 기초가 됩니다. 

오직 말씀으로 태어나고 오직 말씀으로 양육 받고 오직 말씀에 의지하여 

승리하고 말씀을 붙들고 주님 앞에 갑니다. 

이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 말씀과 함께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전해야 할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신 이 말씀을 사랑하고 담대하게 주변 가족들과 이웃들에게 전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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